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우리는 아직 모른다…코로나19가 남긴 상처

등록 2023-06-16 21:37 수정 2023-06-22 22:46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6월 초, 서울에 갔다가 경기도 집으로 돌아오는 밤이었다. 집으로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기보다 공유자전거를 타는 편이 빨랐다. 습관대로 자전거를 탔지만, 잠시 뒤 닥칠 위기를 직감했다. 어머니와 산책하던 천변을 지나야 한다. 석 달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곳은 다시 가기 힘든 곳이었다.

그곳에 가고야 말았다

순식간에 닥친 그곳을 돌아보다 자전거가 흔들려 넘어질 뻔했다. 어머니가 자주 앉던 돌계단이 보였다. “엄마, 여기서 걷고 있어” 이렇게 말하고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왔다 갔다 했다. 틀어드린 노래를 들으며 걷거나 앉아 쉬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디 가기가 겁나던 코로나19 대유행 시절, 팔순 엄마와 오십 대 아들의 한적한 산책 ‘루틴’이었다.

스물다섯 취업한 이래로 집은 잠만 자는 곳이었다. 팬데믹으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자 어머니와 같이 밥 먹는 날이 확 늘었다. 대개 하루 한 끼는 샐러드, 한 끼는 어머니가 차린 밥이었다. “너한테 이렇게 밥해준 적도 없다.” 팔순의 노모는 힘드시면 주문처럼 말했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생활전선에 나섰던 어머니는 50여 년을 같이 산 아들을 그렇게 위했다. 코로나19 유행 기간 내내 어머니와 단둘이 붙어 지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여건이어서 다행이었고, 노모와 사는 감염병 취약 가정에 대한 부서의 배려도 고마웠다.

당시는 “요즘 누가 회사에서 일하냐” 너스레도 떨었다.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으려고 모자는 고군분투했다. 가고 싶은 곳 가기를 꾹 참았고, 만남을 미루었다. 백신을 맞으라면 가장 먼저 맞았다. 팔순의 노모, 50대 기저질환자 아들은 일찌감치 백신 4차 접종을 마쳤다. 팬데믹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는 대유행이 끝나갈 무렵, 이제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해도 야외에서조차 벗지 않으셨다. 운도 좋아 우리 모자는 코로나19에 한 번도 감염된 적 없었다.

지난겨울, 그 지긋지긋했던 코로나19가 엔데믹에 다다를 무렵 어머니와 이별했다. 코로나19가 이제야 끝나고 아, 마침내 일상으로 돌아왔구나 했던 순간에 어머니는 쓰러지셨다. 팬데믹 이전에 해마다 가던 타이의 바닷가였다. 코로나와 관련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관련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코로나19만 없었다면 어머니는 더 자주 밖에 나가시고 더 튼튼한 다리와 심장으로 사셨을 것이다. 코로나만 없었다면 해마다 그 바다에 가서 더 익숙하셨을 것이다. 이 유례없이 길었던 팬데믹이 우리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앞으로 끼칠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3년의 시간에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머리로 다 예측하지 못하는 이런저런 ‘공백’이 생겼다.

짐작과 다른 코로나19 대유행의 ‘공백’

“내가 돌아갈 수 있던 곳, 그녀가 있던 곳, 그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롤랑 바르트는 60여 년을 같이 살았던 어머니를 잃고 <애도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가 매일 써내려간 일기를 읽으며 ‘돌아갈 곳’이 없어졌음을 절감한다. 그 어떤 어려움도 어머니가 있으면 지나가는 일이었다. 걱정이 태산이라 심란한 마음에 짓눌리다가도 어느 순간 ‘아직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스스로 위로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 출발점이 되는 어머니가 있어서였다. 미련하게도 이제야 그걸 알았다. 어머니 덕분에 지난 40년을 아무 일 없이 살았다. 드라마 <나쁜 엄마>의 영순(라미란), <닥터 차정숙>의 정숙(엄정화)도 끝에 자식에게 편지를 쓴다.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읽는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