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대규모 도심 집회를 열었던 2023년 5월31일, 서울 세종대로 일대의 경찰기동대원들은 등 뒤에 검은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이들이 멘 가방에는 농도 0.0045%의 캡사이신 희석액 3.5ℓ가 담겨 있었다. 캡사이신 최루액 분사기는 2017년 이후 경찰이 집회 해산 목적으로 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윤희근 경찰청장이 이날 집회에서 불법행위가 발생하면 분사기를 사용해 해산하겠다며 6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경찰이 불법 집회·시위 해산, 불법행위자 검거 훈련을 재개한 것도 2017년 이후 처음이다.
2023년 5월 중순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1박2일 ‘노숙집회’를 계기로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 경찰의 집회·시위 강경 대응 기조가 본격화하고 있다. 5월23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그 어떤 불법행위도 방치, 외면하거나 용납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다음날, 당정협의회에서 집회·시위 제한 방안이 논의된 데 이어 진압용 장비를 투입한 것이다. 경찰은 5월2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야간문화제와 노숙농성을 하려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했다. 31일 새벽에는 전남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한국노총 간부를 곤봉으로 내리쳐 진압하기도 했다.
6월8일 노동·인권단체들이 연 ‘5월25일과 26일, 1박2일 대법원 앞 문화제 및 노숙농성 인권침해 보고회’에서 이영수 한국지엠 비정규직지회장은 “지난 3월까지만 해도 대법원 앞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해왔던 일인데 대통령 말 한마디로 한순간에 뒤집혔다”고 말했다. 금속노조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는 한국지엠을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의 대법원 선고가 지연된다며,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선전전·문화제·노숙농성을 지난 2년간 진행했다.
달라진 분위기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 뒤 보인 반노동 기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물연대 파업 강경 대응, 노조 회계 투명성 제도 개선, ‘건폭 몰이’ 등으로 노동계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최근에는 노동·시민계의 문화제와 노숙농성을 집시법의 사각지대를 이용한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미신고 집회는 있을지 몰라도 폭력이 없는 한 불법 집회는 없다”며 정부의 관점이 국제인권기준과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유엔이 2016년 발표한 ‘적정한 집회관리 공동보고서’에는 “정부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해 집회가 불법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이를 집회를 해산시키는 근거로 이용해서도 안 된다”고 돼 있다는 것이다.
시민사회도 경찰의 달라진 기류를 체감했다. 2022년 8월부터 주말마다 윤 대통령 규탄 집회를 여는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의 권오현 공동대표는 “이태원 참사 이후엔 경찰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2023년 3월부터 태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단체가 신고한 집회 시간보다 집회 시간대를 줄이는 등의 제한통고가 많아진 게 대표적이다. 권 대표는 “약 한 달 전부터는 (단체가) 천막농성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인도 위에 부스를 설치하지 말라거나, 화장실 설치 위치를 이전과 달리 제한하는 일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주화 이후 한국 경찰은 물리력 사용 위주의 집회·시위 대응 기조를 유지했다. 이 기조가 바뀐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다. 2016년 10월∼2017년 4월 연인원 16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촛불집회는 물리적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진행됐다. 그동안 집회·시위를 관리와 통제, 진압의 대상으로 바라본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성이 제기됐다. 2017년 9월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경찰개혁위원회는 경찰의 집회·시위 대응 패러다임을 전환하라고 권고했다.
경찰개혁위는 헌법에 있는 기본적 인권의 보장과 실현을 위해 기존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화적 집회·시위는 최대한 보장하며, 신고와 진행 과정에서 사소한 흠결이 있더라도 경찰력 행사를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고 사안은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백남기 농민을 쓰러뜨려 숨지게 한 살수차의 사용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도록 권고한 내용이 대표적이다. 이후 경찰은 ‘살수차 운용지침’을 폐기하고 살수차를 폐차했다.
선진국의 집회·시위 대응 패러다임도 강제적인 물리력 행사에서 대화와 협력에 기반을 둔 ‘협의 관리 모델’로 변화했다. 독일은 일부 주 집회법에 경찰이 평화로운 집회·시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협력 의무’를 명문화하고, 스웨덴은 2008년부터 집회 주최 쪽과 소통하고 갈등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대화경찰’을 도입했다. 한국도 스웨덴 사례에 착안해 2018년부터 한국형 대화경찰제도를 운용 중이다. 정부는 야간문화제와 노숙농성을 집시법의 사각지대를 이용한 ‘불법 집회’로 본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2009년과 2014년 해가 진 뒤부터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야간 시위를 전면 금지한 집시법 제10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한 나라에선 일부 규제가 강화됐지만, 한국과 단순 비교하기엔 어렵다. 노란 조끼 운동으로 시위대와 경찰 간 물리적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한 프랑스는 2021년 새로운 집회·시위 관리 지침을 발표했다. 이 지침은 평화로운 집회·시위를 보장하기 위해 폭력 행위를 유발하는 사람을 선별해 법 집행을 하고, 경찰의 물리력 사용을 이전보다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국의 경우, 집회·시위 규제 최소화를 고수했지만 2021년 소음 규제와 경찰력 실효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했다. 다만 개정 이후에도 옥외집회 사전신고 의무가 없는 영국과 한국 상황은 다르다.
대통령의 강경 발언으로 6년간 쌓아올린 ‘대화와 협력’ 패러다임이 흔들리고 있다. 자취를 감췄던 진압용 장비가 집회·시위 현장에 다시 등장한 것은 징후적이다. 랑희 활동가(인권운동공간 활)는 “실제 장비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현장에 가져온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집회 참여자들이 위축되는 효과가 생길 뿐 아니라 경찰의 태도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집회 현장에서 양쪽의 긴장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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