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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책으로 쓴다면 열 권도 모자랄 것이다.”
어른들이 툭툭 내뱉는 이런 이야기. 과장일 수 있다. 진짜일 수도 있다. 자기 삶을 부풀려 과장하는 허풍선이든 아니든 실제 자서전을 써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어떤 벽에 부닥친다. 자기 삶을 기록하는 것은 영광뿐만 아니라 늙은 상처와 가혹한 고통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써내려가다 어떤 순간에는 내 삶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지도 질문하게 된다. 이에 박미라(59) ‘치유하는 글쓰기 연구소’ 대표와 한경은(48) ‘통합예술심리상담연구소 나루’ 대표는 “모든 삶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답한다. “자신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인생을 통합해 큰 그림을 그려보려는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이들은 말한다.
두 사람은 자신의 심리적 이슈를 중심으로 한 ‘치유 글쓰기’와 자신의 인생사를 맥락에 따라 서술하고 재해석하는 ‘치유적 자서전 쓰기’를 안내해왔다. 최근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이츠 마이 라이프>(그래도봄 펴냄)를 출간했다. 자전적 에세이 쓰기를 설명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노트처럼 직접 자신의 삶을 쓸 수 있게 공백을 둔 다이어리 구성을 접목했다.
저자들은 자기 인생을 쓰려고 마음먹었다면 뜨겁고 솔직하게 쓰라고 말한다. “진짜 인생 이야기는 진실할수록 아름답습니다. 자기 삶을 뽐내기 위해 이 책을 쓰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2023년 5월23일 오전, 반짝이는 햇살이 쏟아지는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정원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사람들은 왜 자서전을 쓰려 할까.
박미라(이하 박) “자기 삶을 책으로 쓰는 건 인생을 통합해보려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나는 욱하는 성격이야’ ‘나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어’라는 단편적 심리 문제에 자주 매달리지만 자기 삶을 통합해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 파편화된 경험을 모아 맞춰보면 무엇이 되는지 알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 것 같다.”
한경은(이하 한) “인간에게는 돌아보기 본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산에 올라가다가 무심코 돌아볼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얼마나 왔는지 알게 된다.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한참 헤엄치다가 뒤돌아본다. 이 길이 맞나? 맞게 가고 있나? 내 옆에 누가 있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자서전 쓰기는 주로 여성이 관심을 두는 듯한데.
박 “석사 때 여성 민요를 연구했다. 들여다보니 여성의 삶을 다룬 ‘서사 민요’가 엄청나게 많았다. 15살에 ‘시집’와서 어떻게 살았는지 기나긴 노래를 부르는 식이다. 그것이 나는 자서전의 시작이라고 본다. 할머니에게 그 노래를 배우고 자기 삶을 이입해 다시 개사해 부른다. 여성에겐 특히나 자기 삶을 풀어내고 싶은 욕구가 많다.”
한 “여성은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자기 삶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일을 자유롭게 시도한다. 내 인생의 좋은 일, 궂은일, 고통까지도 과감하게 드러낸다. 한번 시작하면 단단하고 용기 있게 자신의 좌절을 이야기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해방감을 느끼며 말한다. 반면 남자들은 실패담이나 수치심을 드러내기 힘들어한다. 자칫 이해받지 못하고 공격당할까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박 “취약성을 드러내야 카타르시스가 가능하다. 자기 감정을 드러내 내보내고 나야 자신이 가벼워질 수 있는데, 남녀불문 ‘발설’을 죽음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찜질방에 들어가면 뜨거운데 나와선 시원하다고 하지 않나. 그런 기능이 자서전 쓰기에도 있는 것 같다.”
자전적 에세이 쓰기 기법에 다이어리 구성을 접목했다.
박 “독자가 쓴 ‘인생 책’이 모티프가 됐다. 내가 쓴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2021)을 보고 80대 이영승 할머니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삶을 썼는데, 딸이 편집하고 손녀가 표지를 만들어 책을 완성해 보내왔다. 글쓰기 매뉴얼만 있는 책이 아니라 노트를 겸하면 좋겠다는 욕심을 그때 냈다.”
평범한 사람이 자서전을 쓰려면 주변 도움이 조금 필요하지 않을까.
박 “인생을 기록하는 데 특별한 글쓰기 기술 같은 건 없다. 자기 삶을 특정한 누군가에게 들려주듯 하면 된다. 지나온 삶을 기록하는 데 열중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나 그래도 잘 살았네요’ ‘내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알겠어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인생에 끌려다니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한다.”
한경은 대표는 사진 치유와 글쓰기 치유를 동시에 하는 흔치 않은 전문가인데.
한 “32살에 대학에 들어갔고, 사진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통합예술치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마치니 47살이 됐다. 박미라 대표가 진행하는 ‘치유하는 글쓰기’ 3기 참여자였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와 마음공부를 했다. 사진이나 글이나 둘 다 치료적 매체라는 건 같지만, 이미지와 글은 사용하는 뇌의 영역이 다르다. 이미지는 우뇌, 글쓰기는 좌뇌가 활성화된다. 사진은 투사가 훨씬 강렬하게 일어나고 직접적이다. 글쓰기는 사진 치유보다 훨씬 인지적인 작업이다. 치유 작업을 할 땐 사진과 글을 함께 쓰기도 한다. 나를 상징하는 사진을 찍어보고 글쓰기로 다시 거리를 두게 하고 통찰하게 하는 식이다.”
자서전 쓰기의 팁이 있다면.
박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후다닥 쓰라고 권한다. 자유롭게 써야 내면의 심리치유자가 필요한 말을 하도록 길을 연다. 나에게 필요한 말을 발설하게 해준다. 반대로, 내면의 비판자가 나와서 떠들기 시작하면 글을 쓸 수 없다. 생각만 많아져서 결국 펜을 내려놓게 된다. 진솔한 글쓰기도 어려워진다.”
한 “글을 쓸 때는 내면을 억압하지 않고 쓰게 하지만, 다 쓴 뒤에는 이성적으로 자기 마음을 해석해보라 권한다. 자기 글의 분석가가 되어 줄을 긋고 제목을 다시 달도록 하는 것이다. 내 글에 억압이나 감정이 드러나거나 숨겨져 있는지 찾아보는 작업이다.”
두 사람은 모든 삶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쓰레기 같은 삶도 그런가.
박 “‘내 삶은 너무 우울해, 엉망이야, 지리멸렬했어’ 하던 사람들이 ‘내 인생에 이런 의미가 있었다니, 그런 힘을 발휘했다니, 이런 운명이 있었다니’ 하며 자기 삶이 보잘것없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개고생’을 하고 살았는데, 온몸으로 살아낸 시간을 나쁜 인상으로만 남겨서 되겠나. 그렇게 자기 인생을 남기고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람들은 어떤 것을 쓰기 힘들어하는가.
박 “‘인생의 고비’에 대해 쓸 때 힘들어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면 나쁜 거라는 고정된 생각의 틀이 있기 때문이다. 미래지향적 성향을 보이는 경우엔 과거 경험을 떠올리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과거를 제대로 돌아볼 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될 때 현실감 있는 미래도 꿈꿀 수 있다.”
자기 성취를 쓰라는 대목도 있는데, 이 부분도 힘들 것 같다.
박 “우리에겐 ‘성취’에 대해서도 고정관념이 있다. 성취란 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것, 가시적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작은 성취에도 눈을 돌려보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 힘든 직장이었지만 오래 버텼던 경험, 인생의 어느 시기에 모욕을 견뎌낸 일, 이런 것도 중요한 성취다. 작은 성취를 모두 찾아보면 자신이 꽤 많은 성취를 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다.”
한 “성취한 것을 마음껏 자랑해보라는 의도도 있다. ‘내 인생 맘껏 자랑하기’를 쓰도록 할 때가 있는데 사람들이 어려워한다. 자기 자랑을 민망해하고 익숙지 않아 한다. 내가 놓지 않고 지켜낸 것, 버티고 견뎌낸 일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주의할 점도 있을 것 같다.
박 “사회적 트라우마와 글쓰기 치료를 연구한 미국 사회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는 글을 쓸 때 ‘플립아웃(Flip Out) 규칙’을 지키도록 한다. 트라우마가 떠올라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나 신체적 고통이 예상될 때 곧바로 글쓰기를 중단하라는 것이다. 불편한 느낌이 든다면 호흡과 함께 떠나가도록 허용하는 게 중요하다.”
누가 이 책을 봤으면 좋겠나.
박 “자기 과거사를 반복해서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분은 풀어내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삶에 자신감이 없고 불만족했던 사람도 막상 자기 이야기를 써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부모도 자식에게 자기 삶을 다룬 책을 한 권 정도 남겨주면 어떨까. 성인이 돼서 자신을 성찰하고 싶을 때 문득 부모의 살아온 이야기가 궁금해질 수 있다. 부모는 나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아이를 키울 때는 어땠는지, 어린 시절 나는 어땠는지 등을 부모에게 듣고 싶어진다.”
한 “나는 중년에 접어든 사람이 자기 삶을 써보면 좋겠다. 그 시기를 ‘중간 항로’라고도 하는데 자연스럽게 공허, 우울, 허무감이 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실은 건강하고 좋은 사인이 될 수 있다. 자기 안으로 침잠하고 우울한 시기에 자기 인생을 의미 짓고 앞으로 살아갈 날을 준비하는 힘을 얻고 또 다른 꿈을 꾸게 될 계기로 삼으면 좋지 않을까.”
두 분이 자서전을 쓴다면 제목은 어떻게 달고 싶은가.
한 “2021년 프로그램을 하면서 자서전을 썼다. 지금 다시 쓴다면 제목은 <인간답게 살았던 나>로 하고 싶다. 좌우명이 ‘인간답게 살자’이다. 돌아봐도 인간답게 살았던 것 같으니까.”
인간답게 사는 게 무슨 뜻인가.
한 “신이 되려 하지 않을 것. 거기에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뛰어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저냥도 괜찮아’가 중심에 있다. 그리고 사랑. 사랑이든 상처든 주고받고 사는 게 당연하다는 것.”
박 “나는 자서전을 쓴다면 <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까?>라는 제목을 달아볼까. 부제는 ‘말하고 싶은 본능을 위해?’”
앞으로 계획과 바라는 바는.
한 “(웃음) 나는 미리 계획하고 사는 타입이 아니라 이런 질문이 어렵다. 좋은 치료사로 사는 게 꿈이긴 한데,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어떡하지.”
박 “목표가 꼭 있어야 하나. 없어도 괜찮아.”
글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사진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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