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나는 비건인데, 저 남는 고기 어쩌지? [영국 비건 라이프]

할머니 음식 재현하고 젊은이를 따라 배우며 살지만,
남은 음식을 그냥 못 넘어가는데…
등록 2022-08-07 18:06 수정 2022-08-08 01:21
‘식물기반’ 식품을 파는 슈퍼마켓의 매대.

‘식물기반’ 식품을 파는 슈퍼마켓의 매대.

한때 ‘나는 비건이다’(I’m vegan)라고 말하면서 당당했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이젠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주문한 비빔밥 위에 얹힌 달걀을 먹으면서부터 자격을 상실했다. 아이들은 “달걀은 빼달라”고 주문했는데 버섯비빔밥에 자랑처럼 탱글탱글한 달걀프라이가 오른 것을 보고 불평하며 덜어내지만, 나는 내 몫도 먹고 아이들이 ‘버린’ 달걀까지 먹어치웠다. 내게는 ‘채식’보다 ‘음식은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 상위의 가치다. 이 둘이 충돌할 때 괴롭다.

두부 사러 아시아 마트에 가지 않아도

식구들이 모두 비건이고 집밥만 먹는다면, 완전 채식을 하는 건 절대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슈퍼마켓에서 채소는 얼마든지 살 수 있고 값도 싸다. 우리는 버섯, 시금치, 가지, 호박, 배추를 사랑하고 마늘을 추앙한다. 팬데믹 이후 영국 비건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슈퍼마켓에는 ‘비건’ 혹은 ‘식물기반’(Plant-based) 식품을 파는 매대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우유 대신에 귀리·아몬드·콩·코코넛·캐슈너트 음료가 즐비하고, 치킨 없는 치킨윙, 소고기 없는 패티, 돼지고기 없는 소시지와 베이컨 같은 대체육도 많다. 가장 반가운 것은 두부다. 단단한 두부, 보통 두부, 연한 두부, 훈제 두부, 허브 두부 등 종류도 많다. 값은 한 모에 2파운드(약 3200원) 정도다. 두부를 사러 멀리 아시아 마트에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온 것이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비건 인구의 증가가 가져온 변화다.

영국의 비건 인구는 2019년 전체 인구의 1.3%였는데 2022년 초에는 3.1%가 됐다. 베지테리언과 페스카테리언까지 포함하면 2022년 현재, 전체 인구의 14%가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한다. 특히 18~23살 인구 중에는 25%가 고기 없는 식사를 한다.

나는 이런 재료로 어릴 적에 먹었던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그땐 많은 사람이 고기를 먹지 않았(못했)다. 일단 고기가 귀했고, 나물 반찬이 흔했다. 나는 할머니가 해줬던 음식을 재현한다.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편안하고 쉬운 일이다.

내가 비건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20년 3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영국에 봉쇄령이 내려진 즈음이었다. 당시 16살, 18살이던 딸들이 먼저 비건이 됐다. 나는 아이들이 하는 것은 웬만하면 따라한다. 나이 들면서 학습능력이 점점 쇠퇴해 새로운 생각이나 정보는 머리에 잘 입력되지 않는다. 그래서 왕성하게 성장하는 젊은이들을 따라 모방하면서 배우는 편을 택했다. 아이들은 동물복지에 관심이 많았다. 모든 먹거리뿐만 아니라 가방, 구두, 옷은 물론 화장품, 샴푸, 비누, 물티슈도 비건 제품을 쓰기 시작했다. 동물재료로 만들지 않고, 동물실험을 하지 않았다는 인증을 꼼꼼히 살폈다.

두부 종류도 다양하다.

두부 종류도 다양하다.

스테이크에 바쳐진 소의 삶까지 잘 살아보마

동물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 내가 비건이 된 것은, 동물복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코로나19처럼 인수공통감염병이 창궐하는 것이 근본을 따지면 분별없는 육식과 공장식 사육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채식은 도움이 될 거다.

어쨌든 딸들과 나는 각자의 이유로 고기, 생선, 달걀, 유제품 먹는 것을 중단했다. 나이 들면 고기를 좀 먹어줘야 한다고 걱정해주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비건이 된 뒤 오히려 영양을 더 살피게 됐다. 비타민(특히 B₁₂)을 먹고, 단백질을 챙긴다. 두부와 콩이 있어서 안심이고 브로콜리와 시금치 같은 채소는 단백질 함량도 높다. 아이들은 여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비건 레시피를 따라 별미를 만들어 먹으면서 즐거워했다. 아무튼 우린 그런대로 잘 살고 있었다.

모두가 이렇게 살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남편은 고기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혼자 정육점에서 두툼한 소고기를 사다가 스테이크를 굽거나, 튀긴 돼지고기나 치킨, 양고기케밥 같은 배달음식을 주문해 먹었다. 문제는 남긴 음식이었다.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직전의 고기, 나는 그것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 가축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고기를 먹겠다고 인간들이 사육하고 죽여놓고는, 정작 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 목숨이 얼마나 허망할까. 이왕 고기를 먹을 바에야,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취하고, 그 생명에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잘 살아가면 좋으련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가 먹었다. ‘미안하다, 내가 네 몫의 삶까지 잘 살아보마.’

모임이 있는 날도 비건을 고집하는 것이 어렵다. 특히 한국 사람들과 만날 때 그랬다. 영국에 비건 레스토랑은 날로 늘어나지만, 의외로 한식당에는 비건 메뉴가 아직 별로 없다. 한국 음식은 인기가 많아서 한식당은 문만 열면 성공하는 것 같다. 그런데 불고기, 삼겹살, 닭갈비, 양념치킨이 대세다. 파전, 된장찌개, 비빔밥 같은 게 있지만 해물을 넣고 달걀을 올린다. 한국 음식점에 비건 옵션이 별로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아시아 음식점에는 비건 메뉴가 많다. 처음에 우리는 영국식 비건 전문식당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온갖 샐러드로 총천연색 화려한 플레이팅을 선보이지만, 비싼 가격을 고려하면 그다지 특별한 식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인도음식, 타이음식, 중국음식 식당에 가서 비건 메뉴를 시키는 게 훨씬 맛있고 가성비 높다는 것을 곧 알았다.

런던에 사찰음식점이 생긴다면

‘비건’이란 말을 사용하고 젊은 트렌드로 힙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서양이지만, 사실 채식은 동양의 오랜 전통이다. 그래서 비건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지는 와중에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전통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답답하다. 런던에 사찰음식점이 생기면 대박이 날 텐데… 더욱이 발우공양을 하면 절대로 음식을 남길 수 없는데….

냉장고를 뒤지니, 얼마 전 회식에서 사람들과 같이 먹다가 남아서 통에 담아온 파전이 있다. 막상 먹다보니 오징어다리가 씹힌다. 남은 음식 보기를 황금같이 하는 나는 이래저래 비건이 되기는 글렀다.

이스트본(영국)=글·사진 이향규 런던한겨레학교 교장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