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팬데믹과 접경
② 코로나 시대, 국가와 민족의 ‘귀환’
③ 행성적 사이버네틱스
④ 국경여행, 경계에 선 삶들의 만남
⑤ 접촉지대에 산다는 것
⑥ 의료와 문학 접촉지대와 치유공간
⑦ 과학과 미신의 경계에서
⑧ 중국-홍콩 체제의 변화
⑨ 옛 동·서독 접경과 DMZ 생태계
⑩ 보건 위기와 젠더 불평등
⑪ 그리스신화가 말하는 경계 허물기
⑫ 러시아 내부의 경계선들
⑬ 예술 경험과 팬데믹
⑭ 광주 고려인 마을과 코로나19
코로나19는 개인과 사회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국민국가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지만, 바이러스에 대한 대응은 국민국가 단위로 이뤄져 국경선을 더욱 두껍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외적 경계선만이 아니라 내적 경계선 역시 두껍게 하고 있다. 내적 접경지대에 거주하는 이주민의 삶에도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이 글에서는 이주민 사회 중에서도 고려인 사회, 그중에서도 광주광역시 고려인 마을과 코로나19를 살펴보려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고려인 7만6880명이 거주(2021년 4월 법무부 통계 기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인이 한국으로 귀환이주를 감행한 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연해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이주민에 대해서 1850년대 이 지역을 여행한 러시아 여행가들이 목격담을 남기기도 했지만,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서에 보존된 군무지사의 보고서와 이주민 대표 최운보의 청원서 같은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1863년에 열세 가구의 조선인-이주민이 연해주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스스로를 ‘고려 사람’으로 불렀던 조선인-이주민의 이주사는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첫째는 월경민으로서 살아가던 시기(1863~1937)로,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조선인-이주민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에 정착했다. 둘째는 유형민의 시기(1937~1956)였다. ‘일본의 스파이’라는 구실로 민족 전체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뒤 거주 이전을 제한받았던 시기다. 셋째는 소비에트 국민으로 인정받은 시기(1956~1991)인데, 소련의 대도시로 이주가 허용됐고 주류사회로 진입이 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독립국가들의 국민으로 살게 된 시기(1992~현재)로 이주 양상이 다양해졌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이 해체된 뒤 중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 강화 정책과 체제 전환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으로, 많은 고려인이 역사적 고국인 한국으로의 귀환이주를 선택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로 유입된 고려인들은 경기도 안산 땟골, 인천 함박마을, 충남 아산 읍내리, 광주광역시 월곡동, 경기도 안성 내리, 경북 경주 성건동 등에 모여 살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고려인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 ‘광주 고려인 마을’이다. 고려인 마을이 위치한 광산구 월곡동은 광주의 하남공단과 평동공단 인근, 광주시 외곽에 있어 농촌으로의 접근성이 편리해, 공장과 농가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췄다. 인적 규모로는 안산·인천·아산에 이어 네 번째이지만, 응집력과 체계적인 마을 운영 면에서는 국내 최고 수준이다. 광주 고려인 마을의 이런 특성은 코로나19 확산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아 더욱 빛난다.
광주시가 수도권 지역과 비교해 코로나19 발병률이 낮지만, 특히 고려인 마을은 코로나19 방역에 잘 대처한 지역임을 2021년 1월과 8월에 시행한 두 차례의 선제 검사로 인정받고 있다. 애초 선제 검사도 고려인 마을 인근 대형마트와 식당 등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고려인 마을의 코로나19 발병 사례가 보고되지 않자 “왜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만 코로나19 발생 건수가 나타나지 않는가? 혹시 은폐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 때문에 시행됐다.
이런 의문을 불식하기 위해 광산구청은 선제 검사 시행을 결정했다. 이 선제 검사를 통해 광주 고려인 마을의 특성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지역의 고려인 집거지들과 마찬가지로 광주 고려인 마을도 공단 인근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다른 고려인 집거지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것과 달리, 광주 고려인 마을에는 설립자가 존재한다. 이 마을의 디딤돌을 놓은 것은 현재 사단법인 고려인지원센터의 설립자이자, 새날학교 설립자인 이천영 교장과 고려인지원센터의 신조야 대표다. 코로나19 선제 검사는 우선 고려인 마을 거주자들의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하는 라디오방송인 <나눔 방송>으로 홍보됐다. 아울러 이천영 교장과 신조야 대표는 함께 마을을 돌며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러 공원에 나오라고 러시아어로 거리 안내방송을 했다.
그 결과 2021년 1월에 시행된 1차 선제 검사는 고려인 마을 다모아공원에서 사흘 동안 시행됐다. 검사 첫날에는 450명, 둘째 날에는 600명, 셋째 날에는 700명, 모두 1750명이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마을 전체에 등록된 고려인이 약 5800명인 것을 고려하면 단시간에 매우 높은 검사율을 보였다. 이 검사에서 단 한 명도 코로나19 양성이 나오지 않았다. 이에 고려인 마을은 ‘코로나 청정 지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4차 대유행이 시작된 시기인 2021년 8월17~18일에 시행된 2차 선제 검사에서도 고려인 확진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검사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중앙아시아인 3명이 양성 판정을 받아 격리됐다. 이처럼 신속한 검사 진행과 청정한 마을 유지가 가능한 배경에는 앞에서 말한 마을 설립자들이 있다. 고려인지원센터는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상황에서 지역 내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에 방역수칙 준수를 적극적으로 안내하고, 신조야 대표는 직접 소독약을 들고 가게마다 다니며 수시로 소독한다.
광주 고려인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인 이천영 교장은 여러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일어선 입지전적 인물이다. 12살 어린 나이에 가난 탓에 고향인 전북 전주를 등지고 단신으로 서울에 도착한 그는, 중국집 배달부와 이발사를 비롯해 여러 고된 일을 했다. 소년공으로 공장에 취업해 누울 공간도 부족한 열악한 환경에서 칼잠을 자며, 체불된 임금 지급을 요청하다가 공장주한테 몰매를 맞기도 했다. 그에게 삶의 전환점은 20살에 군대 징집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을 때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학력 미달로 군대 징집에서 거부당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80년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26살에 전남 화순 능주중학교에서 영어 교사가 됐고 1988년부터는 전남여상에서 근무했다. 교사로 재직하던 중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천영 교장의 삶을 변화시킨 첫 만남은, 1999년 화창한 봄날에 가족과 함께 쑥을 캐러 간 곳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주노동자를 돕는 일을 시작했다. 교직자 선교회 회원들과 동료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광산구 하남공단에 창고를 임대해 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를 개원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의 직접적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후 외국인 노동자 무료진료소, 인권상담소, 광산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 공단교회, 한반도사랑교회, 쉼터, 무료급식소 등을 세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의 궤도로 들어선 그의 삶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된 두 번째 만남은, 2002년 고려인 신조야와의 만남이었다. 우즈베키스탄 대학에서 의류디자인을 전공한 신조야는 한국에 거주하던 딸을 만나기 위해 2001년 입국해 2개월 동안 인천의 횟집에서 일하다가, 이후 전남 함평의 콘크리트 회사에서 일했다. 2002년 임금 체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주에서 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를 운영하던 이천영 교장을 찾았고, 이를 계기로 고려인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에 동행하게 됐다.
신조야 대표가 월곡동에 도착하던 2002년에는 카자흐스탄 남성과 결혼한 고려인 여성 한 명밖에 없었다. 둘의 만남은 고려인 이주민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일에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냈다. 이들은 고려인지원센터를 개설해, 가방 하나만 들고 온 고려인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일자리를 구해줬다. 이 일은 2021년 9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른 이주민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고려인 노동자들 역시 빈번하게 임금 체불 문제를 겪는다. 센터는 노무사 상담으로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유행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신규 입국이 제한돼 노동력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임금 체불 비중이 현저히 낮아졌다. 이는 역설적으로 코로나19가 가져온 긍정적 효과이기도 하다.
취업 문제 해결과 더불어 이주노동자 정착에 가장 필요한 도움은 의료 지원이다. 현행법으로는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6개월이 지나야 의료보험 가입 대상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6개월 이전에도 환자들이 생기고, 수술이 필요한 위급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고려인지원센터는 월곡동 거주민에 한해 국적(민족)도 병명도 액수도 묻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의 병원비를 전액 지원한다. 병원비는 <나눔 방송>을 통해 모금된다. 고려인뿐 아니라 선주민 개인이나 단체들도 모금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고려인 마을은 광주시민과 고려인들을 이어주는 다리 구실을 하고 있다.
이렇게 고려인들의 정착을 돕던 이천영 교장에게 또 하나의 중대한 만남이 찾아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7살 아이를 맡게 된 것이다. 이 세 번째 만남을 계기로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고, 2007년 1월 아이 2명과 함께 대안학교인 새날학교를 시작했다. 시간도 부족하고 퇴직금으로 재정 적자도 해결해야 했기에, 이천영 교장은 본업인 교사를 그만뒀다. 새날학교는 2011년 학력이 인정되는 초·중·고 과정 위탁형 다문화대안학교로 인가돼, 광주 고려인 마을 자녀는 물론 국제결혼으로 입양된 중도입국 다문화 청소년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발전했다.
2021년 1월 졸업생 23명 가운데 대학 입학을 희망하는 13명 모두가 연세대, 외국어대, 한동대, 국민대, 전남대, 호남대, 광주대, 동신대 등에 입학했다. 또한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은 대부분 학교를 통해 광주 인근 산업단지 기업에 입사했다. 2012년에는 고려인 마을 어린이집, 2013년에는 지역아동센터가 문을 열었다. 2017년에는 고려인 청소년문화센터를 개소했다.
다른 지역의 고려인 청소년들이 코로나19로 부정적 영향을 받지만, 광주 고려인 마을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이런 교육체계 아래 보호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인천 함박마을에선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고려인 청소년들이 고려인 택배회사, 음식점 등 취업 현장으로 뛰어들어 이주민 청소년들의 교육이 무너지고 있다. 이는 고려인뿐만 아니라 이주민, 더 나아가 저소득층 청소년이 팬데믹 상황에서 공통으로 처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타 지역과 차별성을 갖는 광주 고려인 마을의 탄탄한 교육 인프라는 이 지역으로의 고려인 유입을 더욱 가속한다. 2021년 상반기(1~5월)에만 약 200명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대부분 아이들을 동반한 가구다. 고려인 마을은 자경단을 조직하고 광산구 경찰서와 협업해 역내 순찰을 돌고 있는데, 그 덕분에 범죄율이 0.02%로 떨어졌다. 이는 한국의 다른 지역 범죄율과 비교해 현저히 낮은 수치다. 이러한 안전성 보장 역시 유입 인구 증가를 가져오는 요인이다.
이천영 교장은 고려인 마을이 전주의 한옥마을처럼 광주의 특화된 지역으로 고려인들의 음식문화, 중앙아시아와 여러 국가들의 전통문화와 광주 거주 한국인, 더 나아가 한국의 선주민들과 문화적으로 어우러진 지역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의 바람은 네 번째 만남인 월곡 고려인 문화관 ‘결’의 김병학 관장과의 만남을 통해 이뤄졌다. 김병학 관장은 1992년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에서 한글학교를 개원한 이래, 카자흐스탄의 한글문화센터 소장, 현지 대학의 한국어 교수, <고려일보> 기자 등으로 2016년까지 일했다. 카자흐스탄에서 체류한 24년 동안 그는 고려인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귀중한 유물 1만2천 점을 수집했다. 이를 바탕으로 2021년 5월 월곡 고려인 문화관이 개관했으며, 특히 2021년 8월14~31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고려인 문화관은 고려인들의 정체성 구심이 되고 있으며, 선주민에게는 고려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다리가 되고 있다.
광주 고려인 마을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거리축제, 추석·설날 같은 민족 명절에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축제를 기획한다. 고려인 문화관 역시 고려극장 특별전 등을 마련했다. 코로나19로 막힌 이와 같은 의미 있는 행사들이 이른 시일 안에 실현되기를 바란다.
이처럼 광주 고려인 마을은 질병이 초래한 위기 상황을 잘 타개하면서 건전한 공동체 만들기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고려인 마을의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안정의 기반이 되는 국적 부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과거 강제이주를 경험한 민족 중 소련 해체 당시 국외에 모국이 있는 민족에는 독일인, 유대인, 재러 한인(고려인)이 있었다. 이 중 독일과 이스라엘은 귀환이주를 선택한 모든 사람에게 바로 국적을 부여했다. 오직 한국만이 이들을 아직도 타자화하며 3D 업종에 필요한 이주노동자 정도로 여긴다. 고려인에게 국적을 부여해 지속적인 정착의 토대를 마련하고, 의료와 체불임금 해결 등에 국가가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고가영 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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