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팬데믹과 접경
② 코로나 시대, 국가와 민족의 ‘귀환’
③ 행성적 사이버네틱스
④ 국경여행, 경계에 선 삶들의 만남
⑤ 접촉지대에 산다는 것
⑥ 의료와 문학 접촉지대와 치유공간
⑦ 과학과 미신의 경계에서
⑧ 중국-홍콩 체제의 변화
⑨ 옛 동·서독 접경과 DMZ 생태계
⑩ 보건 위기와 젠더 불평등
⑪ 그리스신화가 말하는 경계 허물기
⑫ 러시아 내부의 경계선들
코로나19 방역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단체 코비드워치(CovidWatch)가 2020년 4월29일 공개한 보고서를 보면, 가정에 경제적 어려움의 여파가 불어닥치면서 봉쇄 완화를 지지하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이 설문조사에서 봉쇄 완화 지지 1위를 차지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러시아 응답자의 60%는 바이러스가 완전히 차단되지 않더라도 정부가 기업 활동 재개를 허용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특히 코로나19 확진자 감소 추세에 있던 중국(59%), 독일(50%), 이탈리아(53%) 등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감염병 확진이 여전히 증가하는 상태였다는 점에서 러시아가 1위를 차지한 것은 자국 경제 상황에 상당한 불안감을 드러낸 것이고, 이는 소비자 행동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코로나19 팬데믹은 정부 규제로 통제되는데, 그것은 곧잘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 상태’ 개념에 기대어 정의된다. 이것은 봉쇄, 통행금지, 가택격리제도 같은 이동 제한을 말한다. 정부도 실업률 증가 속에 경제적 지원을 목표로 특별한 체제를 출범시켰다. 사람들이 소비자로서 쓸 돈을 벌 방법을 지원하는 조처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발표한 지원금은 미국, 영국, 독일 등이 지출하는 금액보다 훨씬 적다. 게다가 소비 욕구를 자극할 만한 개별 보상 지급은 극히 일부이며 대부분은 대기업에 대한 보조금이다. 이는 러시아인이 공공부문에 계속 고용되지 않는 한 고용인이자 소비자로서 생존할 방법을 스스로 강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 정책의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는 소비 의욕 저하를 초래한다. ‘비상사태’의 법적인 모호함으로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 정부는 ‘비상상황’과 ‘비상상태’라는 두 가지 비상체제를 갖췄다. 둘 다 민권을 정지하되 건강, 재산 피해, 민간 기업의 영업손실은 물론 심지어 지정된 비상지대(한국의 특별재난지역 같은 곳)에 거주하면 보상하게 돼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그 어느 것도 실시하지 않았다. 대신에 러시아가 선포한 것은 사전 비상사태인 ‘특별 경계’이며, 시민과 기업이 입은 손해에 대한 보상 요구를 제한한다.
이런 맥락 속에 소비 동향이나 문화적 특수성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지역적 배경을 가진 러시아인의 소비 패턴과 관심사를 파악할 수 있도록 대략적인 경향을 소개한다.
미용산업은 코로나19로 인한 사업장 폐쇄 상황 속에 놀라운 예외를 보였다. 모스크바 시장과 모스크바 주지사 모두 미용실, 화장품 가게, 사우나 등 면허가 있는 서비스 산업 일부에 예외를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모스크바의 결정을 러시아 전역에서 따르지는 않았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그렇다. 흥미로운 점은 봉쇄 조처 속에 이 예외적인 상황이 초래한 영향이다.
은행 회계감사를 전문으로 하는 40대 중반 변호사 니나는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가 미용실에 가서 외모를 다듬을 수 있어서 안심했다”고 말했다. “남편은 이제 화장도 하지 않은 나를 거의 온종일 보는 상황이다.” 격리 기간에 남편과 항상 마주하기에 직장이 아닌 집에서의 외모가 중요해졌다고 그는 솔직히 말했다. 니나는 내 인류학 연구에 도움을 준 오랜 지인이다.
한편 러시아에서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봉쇄는 이혼과 가정폭력 증가로 이어졌다. 2020년 4월 초 가정폭력 예방 분야에서 활동하는 러시아의 9개 비정부기구(NGO)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이러한 증가에 대응하는 긴급조치를 취하도록 호소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아파트에 갇혀 있고 경찰이 시민을 직접 접견하지 않아 고소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했다. 실업률과 술 소비량 증가도 지적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이리나 미하일로브나(82)는 “티브이에서 5월 연휴가 지나면 생활용품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5월 연휴는 5월1일 국제 노동자의 날에서 5월9일의 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절까지를 뜻한다. “실제 티브이에서 물품 부족을 언급했느냐”고 물으니 그는 “아니다, 하지만 가격이 오를 거라고 하더군”이라고 답했다. 높은 가격이 식량 부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닥칠 수 있는 ‘물자 부족’을 미하일로브나는 지속적으로 언급했다. 그의 장보기 전략은 ‘사재기’라는 문화적 경험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리나 미하일로브나와 그 세대 사람들에게 현재 상황은 옛소련 시대 상품 부족에 대한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그와 동시에 소련 몰락 이후 1998년과 2008년의 경제위기에 얻은 중요한 문화적 경험과도 일치한다.
소련 시대 결핍에 대한 문화적 이미지는 미하일로브나의 기억뿐만 아니라, 피에르 노라가 ‘기억의 장소’(Les Lieux de mémoire)라고 명명한 집단 기억의 지형에서도 유통된다. 미하일로브나보다 훨씬 젊은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토론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들은 감염병에 대처하는 방법을 논의한다. 소련 시대 사재기의 문화적 이미지는 러시아어로 된 페이스북 공간 전체에 걸쳐 일상적으로 눈에 띈다. 이런 문화적 이미지가 최근 소비 패턴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소련 시대의 검소함을 흔히 언급하는 것은 최근의 ‘건강하고 단순한 식단’ 관련 담론이다. ‘건강한 식단’은 육식 포기, 메밀을 포함한 곡물 섭취 중시를 의미한다.
하지만 ‘사재기’와 관계되는 문제는 단순히 식료품만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코로나가 유행한 첫 주는 러시아 루블화에 대한 미국 달러와 유럽연합 유로의 10~15% 평가절상과 겹쳤다. 이것은 이미 낭비성 ‘루블 다 써버리기’식 소비로 이어졌다. 더욱이 봉쇄로 인한 실직과 파산으로 돈을 ‘비축’하는 일은 훨씬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전자제품, 주방용품, 의류, 심지어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소비자 지출 증가가 보고됐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추가적인 소비 패턴의 전환이다. 이런 지출 증가의 지배적 형태는 인터넷 기반 소매업에서 발생하는 소비였다. 이 전환은 인터넷이 다른 서비스의 매개체가 되면서 일어났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립은 미용산업에 대한 새로운 욕구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집의 인테리어를 신경 쓸 수 있는 시간과 그렇게 할 만한 ‘가치’도 부여했다. 고립된 상태에서는 각자, 가족마다 디아이와이(DIY)를 하는 동시에 DIY에 도움이 되는 서비스나 조립 등의 시장이 성장한다. 스타일리스트, 요리사, 인테리어 강사, 헬스, 댄스 교사들은 자신이 어떻게 원격으로 옷장 리모델링, 반려견 털 다듬기, 춤 배우기, 창틀에서 채소 재배하기, 요리하기를 도와줄 수 있는지 광고한다. 이는 다시 가옥을 개조하기 위한 DIY 도구 소비를 촉진한다. 이 도구 구매에 러시아인이 가치가 평가절하된 루블화를 써버린다.
2020년 4월까지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200㎞ 떨어진 랴잔시 인근 마을 출신 율리아(25)는 지역 농산물을 전문으로 공급하는 회사에서 일했다. 회사가 파산하면서 그는 직장을 잃었다. 이 회사는 농민과 소비자 간의 대면과 현금 교환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인터넷쇼핑몰과의 경쟁을 견디지 못해 폐업했다. 그러나 이 사업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러시아 전역에 지역 봉쇄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은 도로 통제와 일관성 없는 지역 통행증 발행 시스템이다. 이로 인해 농민과 소비자의 농산물을 통한 지역 교류가 사실상 중단됐다. 많은 농촌이 고립된 것은 뚜렷하다. 여행 제한은, 원거리와 열악한 도로망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정보 격차로 형성된 내부 시장의 경계와도 겹친다.
월 25만원으로 채소·닭 키우며 살아남기고립의 한 측면은 ‘도시 지역주의’가 부활하는 현상이다. 본인의 시골 별장에서 ‘자가격리’ 하는 것은 정보기술(IT), 창작 분야, 은행업에서 일해 재택근무가 가능한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 꽤 흔하다. 시골로 간 도시 중산층은 생계형 농업을 직접 개발하고 지역 농민과 상호 교류한다. ‘중산층의 시골 이전’은 코로나19가 대유행하기 이전부터 있던 경향이지만 최근 더욱 강화됐다. 진보적인 생태적 사고방식과 다운시프팅(Downshifting·생활의 단순화), 종교적이거나 우익적인 동기 등 다양한 문화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다.
도시 중산층과 농민 사이 격차 한편에는 앞서 소개한 실업자 율리아 가족이 있다. 그는 부모와 함께 마을에서 산다. 한 달에 180유로(약 25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고 유치원에서 일하는 어머니 월급으로 온 가족이 간신히 생존한다. 그의 아버지는 비합법적으로 현금으로만 팔리는 꿀을 만드는 양봉장을 운영한다. 율리아가 설명하듯이 “지금은 벌집을 숲으로 가지고 나가야 하는 봄철인데, 우리를 봉쇄 위반으로 제지할 수 있는 경찰 때문에 많은 양봉가가 그들의 양봉장을 버렸다”.
그는 어머니 수입으로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손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꾸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들에게 채소를 제공하는 텃밭이 있고 그들과 소고기, 돼지고기, 가금류를 나눠 먹는 친척과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
인류학자 알렉세이 유르차크는 ‘우리’(svoy)라는 문화적 개념이 도시적이고 경력에 집착하는 러시아인에게 중요한 정체성의 지표였으며 후기 사회주의의 문화 질서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율리아 사례에서 ‘우리’는 가정, 토지, 친족, 이웃의 문화적 확장이다. 유르차크에게 ‘우리’는 ‘국가’의 반대어이다. ‘우리’는 공식적인 사회가 아닌 소집단의 정체성, 비공식 문화를 의미한다. 율리아는 같은 마을에 ‘자가격리’로 쓰이는 모스크바 주민 소유 시골 별장과 자기 가족의 ‘우리’의 세계를 대조시킨다. 율리아와 이웃들이 보기에 모스크바의 중산층이야말로 마을 전체에 퍼지기 시작한 감염병의 감염원이다. 시골로 내려간 모스크바 중산층은 최근 이웃 마을에 문을 연 러시아 최대 온라인 패션 소매업체인 와일드베리 현지 배달센터의 단골손님이어서 율리아에게도 그들의 적지 않은 소비가 보이지만, 자급자족하는 그에겐 그럴 만한 소득이 없다. 그들과 율리아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셈이다.
러시아 소비자는 어쩔 수 없이 빵 굽기나 씨앗 심기, 채소 재배, 닭 키우기 등을 하면서 자급자족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거기에는 소비 간소화와 사회적 책임, 새로운 지역주의의 추세가 두드러진다. 이런 성향은 선택이라기보다 필요성의 문제다. 그들은 이주노동자 같은 ‘위험한 타자들’뿐만 아니라 ‘타자’로서 국가나 부유한 관광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한다.
코로나19는 러시아 사회의 젠더, 계급, 지역 사이 ‘경계선’을 더욱 가시화하고 노출했다. ‘여성성’을 강조하는 소비 경향, 많은 도시민의 루블화 인플레로 인한 ‘사재기’ 등 패닉성 소비, 그리고 농촌에서 ‘진정한 러시아적 가치’를 찾는다면서 시골 별장에서도 편하게 무엇이든 배달시킬 수 있는 도시 중산층과 한 가족이 먹을 식량을 거의 전부 자급자족해야 하는 시골이나 소도시 빈민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격차. 코로나19는 도시와 농촌에서 여러 계층, 여러 사회적 그룹을 서로 응시하게 하면서도 그들의 ‘격차’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니콜라이 소린차이코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고등경제대학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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