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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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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경험과 팬데믹: 그림 속 떡, 디지털 속 꽃

팬데믹 아래 관람 제한되는 미술관·콘서트, 디지털 매체를 통해 박물관과 미술관은 새로운 접경을 그려나가게 돼
등록 2021-08-24 15:06 수정 2021-08-25 01:55
2020년 6월 벨기에 브뤼셀의 보자르 콘서트홀에서 벨기에 음악 아티스트인 로테타 루한 줄라 란달리아가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의 독립 60주년 기념 온라인 뮤직쇼의 공연 연습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0년 6월 벨기에 브뤼셀의 보자르 콘서트홀에서 벨기에 음악 아티스트인 로테타 루한 줄라 란달리아가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의 독립 60주년 기념 온라인 뮤직쇼의 공연 연습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접경인문학 연재 순서

① 팬데믹과 접경

② 코로나 시대, 국가와 민족의 ‘귀환’

③ 행성적 사이버네틱스

④ 국경여행, 경계에 선 삶들의 만남

⑤ 접촉지대에 산다는 것

⑥ 의료와 문학 접촉지대와 치유공간

⑦ 과학과 미신의 경계에서

⑧ 중국-홍콩 체제의 변화

⑨ 옛 동·서독 접경과 DMZ 생태계

⑩ 보건 위기와 젠더 불평등

⑪ 그리스신화가 말하는 경계 허물기

⑫ 러시아 내부의 경계선들

⑬ 예술 경험과 팬데믹

코로나19가 창궐한 지도 벌써 1년8개월째, 더욱 강력하다는 델타 변이의 공포와 함께 바이러스의 전 지구적 확산이 더는 걷잡을 수 없게 된 상황에 예술 경험에 관해 쓰는 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환경·경제·식량·교육, 모든 분야에서 인류의 안위가 위협받는 지금 예술과 같이 생존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 않는 활동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꽃노래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관점을 바꿔 ‘이마저도 못한다’고 생각해보면, 분명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진다. 가능한 것은 모조리 온라인으로 전환해보지만, 그 거리감과 어려움은 어찌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시각, 청각뿐만 아니라 때로 몸 전체와 정서적 협응을 요구하는 예술 감상의 고유한 특성이 스크린 한 겹만큼의 물리적 거리와 크기·차원의 변화(주로 축소)를 거치고 나면 그 날카로움을 사뭇 잃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왼쪽부터)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미술관이 2021년 5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진행하는 기획전시 ‘너랑 나랑’의 온라인 가상현실(VR) 전시 관람장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왼쪽부터)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미술관이 2021년 5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진행하는 기획전시 ‘너랑 나랑’의 온라인 가상현실(VR) 전시 관람장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각자가 위치한 시간과 장소로 미술관을

그뿐만이 아니다. 국내에서 2020년 초부터 수많은 연구자의 노고로 나온 여러 보고서를 살펴보면 코로나19로 어려워진 것은 예술작품이나 공연의 감상만이 아니라 그 창작이기도 하다. 예술을 ‘하기’도 보기도 어려워진 지금, 예술은 팬데믹에 어떻게 살아내고, 우리는 또 어떻게 예술을 다시 살아볼 것인가. 어려움은 이들 창작과 그 역사를 담아낼 그릇, 공연장이나 박물관·미술관 등 시설과 기관에도 존재한다. 문화예술계는 2020년 초부터 되풀이된 ‘잠정적’ 운영 중단 지침에 따른 무력감을 호소한다. 국내에서는 2020년 2월25일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을 비롯한 문화시설의 잠정 휴관이 시작됐다. 이후 박물관과 미술관 등은 휴관과 또 다른 휴관 사이 간헐적으로 온라인 예약제와 동시 관람 인원 제한 같은 방식을 도입하거나, 기존에 기획된 프로그램을 온라인·비대면 방식 또는 거리두기가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식으로 대처해왔다.

코로나19 이후의 변화가 현대 인류가 겪는 초유의 사태이니만큼, 문화예술계 역시 기준과 제한에 맞는 안전한 예술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크고 작은 논쟁과 지난한 시행착오를 거쳐왔다. 특히 미술관은 개관과 임시휴관을 반복해 이에 혼란을 느낄 대중과 관계를 회복하고 다른 방식의 예술 경험을 북돋운다는 또 하나의 과제를 얻었다. 우선 기존 미술관 관람뿐만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 부대 행사를 비대면·온라인으로 옮겨야 했다. 이는 비용이 들고 쉽지 않은 여러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 실무자와 참여자 모두에게 개념의 전환을 요구한 꽤 큰 도전이었다. 요컨대 예술 경험을 미술관이 아닌 각자가 위치한 시간과 장소로 옮겨야 한다.

사실 온라인 관람은 ‘구글 아츠앤드컬처’(Google Arts & Culture) 등의 플랫폼이나 여러 미술관 누리집 등을 통해 오래전부터 시도돼 대중에게도 친숙한 콘텐츠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제한’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2020년 ‘록다운’(이동 봉쇄) 초기,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폴게티미술관에서 시작한 ‘게티뮤지엄챌린지’는 잠자고 있던 사람들의 관람과 참여에 대한 욕구를 일깨워내고 종전 미술관 내 관람을 통해 개별적으로만 이뤄졌던 관객-작품 간 상호작용을 가시화해 공유 콘텐츠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해시태그 #GettyMuseumChallenge). 유사한 ‘도전’이 여러 미술관의 계정으로 시도돼 갑작스러운 폐쇄 이후 미술관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완전히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처럼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팬데믹으로 관광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미술관이 ‘로컬’(지역사회)에 되돌아왔다며 기뻐했는데, 그야말로 신선한 뉴스지만 여러모로 마냥 웃을 일은 아니었다.

2020년 10월 서울의 한 카페에서 케이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팬들이 마스크를 쓴 채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중계되는 콘서트를 즐기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0년 10월 서울의 한 카페에서 케이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팬들이 마스크를 쓴 채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중계되는 콘서트를 즐기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뉴욕·파리, 미술관이 로컬로 돌아왔다

2021년 들어 유럽과 북미는 강력한 백신접종 캠페인을 펼치고 관련 제재를 해제하면서 바이러스의 두려움을 거의 극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델타 변이 바이러스의 유행과 함께 다시 한번 대유행에 직면하면서, 유럽의 경우 엄격한 국경 폐쇄를 비롯한 새로운 방침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2021년 8월 현재 이들 국가에서는 높은 백신 접종률에 기대어 콘서트, 록페스티벌 같은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문화행사를 재개하는 추세다. 롤라팔루자, 피치포크, 글래스턴베리 등 유명 음악축제가 크고 작은 대응책을 마련해 일정을 예정대로 소화하기로 했다. 그간 록다운 등으로 인해 또래 모임과 놀이, 문화생활에 갈증을 느꼈을 젊은층의 호응이 더없이 뜨거운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한 제재 앞에서 문화예술 관련 분야는 언제나 위험도가 높은 분야로 우선 분류되므로, ‘해방’된 업계라 해도 섣불리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여러 차례 임시휴관과 재개장을 반복하는 어려움을 겪은 뒤 더는 휴관이 없을 듯한 분위기다. 2021년 7월, 프랑스에서는 6개월간의 오랜 휴관 끝에 박물관과 미술관이 일제히 문을 열었다. 이를 두고 한 언론은 “예술이 삶 속으로 돌아왔다”고 축하했다.

한편 조건부 재개관 뒤 인원 제한과 고요한 전시실에서의 예술 감상은 마냥 상쾌하지만 않은 쾌적함을 제공한다. ‘제한’이라는 낱말이 주는 석연치 않은 기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019년 여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 추후 전면 예약제를 시행한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각계각층에서 많은 사람의 우려와 질타가 있었다. 심지어 같은 해 10월에는 이런 비판을 수용해 결정을 철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은 이를 너무나 손쉽게, 단숨에, 이 모든 절차가 당연하고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제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지나가다 즉흥적으로 들를 수 있는 여가와 환기의 장소가 아니게 됐다. 여러 전문가는 이것을 개탄한다.

미국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미술관은 컬렉션과 특별전시를 통해 매주 새로운 주제로 어린이들이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실시간 온라인 세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구겐하임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미국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미술관은 컬렉션과 특별전시를 통해 매주 새로운 주제로 어린이들이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실시간 온라인 세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구겐하임미술관 누리집 갈무리

박물관·미술관이 담당해온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

팬데믹 이후 모두가 새로운 사회적 격차의 발생과 심화를 우려한다. 이는 물리적 공간의 예술 경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담당해오던 교육의 기능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온라인에서 접근 가능한 프로그램이나 디지털 자료에의 의존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현장성’은 박물관·미술관 교육의 필요충분조건이자 당연한 이론적 근간이었다. 또한 박물관·미술관과 지역 공동체의 유기적 협업과 사회통합적 역할이 점차 강조되던 추세인 만큼, 팬데믹에 따른 갑작스러운 단절은 세계 곳곳에서 생각보다 많은 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이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프릭컬렉션 등 미국 뉴욕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줌(Zoom) 화상회의를 이용한 실시간 학급 단체관람 프로그램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코로나19 이후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격 대체돼 교사와 학생, 양육자 또는 보호자가 혼란을 겪고 교육 격차와 사각지대가 발생한 문제는 언론과 연구를 통해 익히 알려졌기에 이런 조처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 경험의 온라인·비대면화 양상은 코로나19로 분명 가속되기는 했으나 과거에 이미 시작된 변화다. 다만 이것이 팬데믹 이전에는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고 직접 감상을 보조하는 교육적 역할이 가장 큰 덕목이었다면, 이제는 월등히 우세한 감상 방식이 되어 그 역할이 더욱 다각화하고 있다. 새로운 온라인 스트리밍(실시간 재생) 비대면 관람 문화는 과연 경계를 지우는가? 누구를 더 많이 대변하는가? 애초에 박물관은 평등한 지식의 공유와 전파를 스스로 존재 이유로 천명했다. 원론적인 말로 들리지만, 또 그만큼 당연한 이야기다. 티켓이 풀리는 시각에 대기하고 있다가 누구보다 빠르게 클릭할 수 없다면 전시도 마음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박물관 논리다. 온라인 콘텐츠가 실제 방문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 하이퍼텍스트에 전보다 더 많이 의존하는 것 역시 예술 경험 안에서 경계를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요소다.

전시회의 안과 밖은 어디일까? 온라인으로 접속 가능한 사진, 영상 또는 스트리트뷰나 가상·증강 현실 등 디지털 매체를 통해 박물관과 미술관은 새로운 접경을 그려나간다. 기실 소장품과 전시회를 어떻게 디지털화하고 어떤 방향성을 택할지는 이 기관들이 이미 수년 전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온 주제로, 기관이자 장소로서 이들의 존폐 문제마저 여기에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접종센터가 된 전시공간, 접종센터의 예술작품

대체로 필연적인 보수적 성격 때문에 과거 무덤이나 엄숙한 종교시설을 연상시키기도 했던 박물관과 미술관이 과연 오늘날 젊은 관람객 세대의 문화 또는 팬데믹이 요구하는 일종의 기계적 진보에 호응할 수 있는지, 시공간의 물리적 제약을 넘어 더 넓은 공중을 만날 수 있는지, 그리하여 결국엔 경계를 조금 더 밀어내볼 수 있는지, 더 많이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고 다른 경계와 접촉할 수 있는지, 팬데믹으로 인해 박물관과 미술관은 새로운 시험에 직면했다. 요컨대 예술은 감각이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없는 이 새롭고 이상한 세계에서 스스로 형태와 방식을 바꿔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미술관 내 전시공간이 백신 접종센터로 쓰이기도 한다. 반대로 접종센터 안에서 예술작품이 진열되거나 음악이 연주되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이런 예술 경험과 의료활동의 접목은 예로부터 예술에 결부된 치유의 가능성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또 어떤 것은 더욱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방향으로 회귀한다. 예컨대 관람객이 사라져 작품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는 미술관 전시실에서 우리는 음악과 춤을 감상하게 됐다. 2020년 8월 말, 프랑스의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요안 부르주아의 작품 <위대한 유령>(Les Grands Fantômes, 2017)이 포털 사이트 네이버와 LG아트센터의 협력으로 국내에서 한시적으로 스트리밍됐다. 부르주아와 무용수들의 내한 계획이 코로나19로 불투명해지자 이들이 직접 공연할 무대를 대신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스트리밍이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다. 우리가 이를 텔레비전, 컴퓨터나 휴대전화 화면을 거쳐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미술관이 휑하게 비워지는 것을 원치 않거나, 반대로 공연예술가들이 관객을 만나지 못하고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한 채 잊히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가 된다. 물론 그 무엇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이런 장면은 머릿속 어딘가에서 건조하게 휘발해가던 세상과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전과 달리, 이 아름다움은 경계를 전제로 한다.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 ‘자기 보호’와 예술 경험

개인적 이야기이지만 갓 돌이 지난 아이가 얼마 전부터 드디어 자기 얼굴에 마스크가 얹히는 것을 허락해 이제는 전시장에 아이와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 물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자괴감도 들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아이와 함께 볼 생각에 떨렸다. 스스로 보호하면서 사람들 속에 함께하기, 한 살배기의 첫 미술관 나들이, 일종의 첫 사회활동에 지워진 첫 번째 과제였다. 이는 모두의 예술 경험에 주어진 새로운 과제이기도 하다. 한편 ‘자기 보호’와 예술 경험은 양립 가능한 문제일까? 아니, 그 전에, 지금껏 두 문제를 한 쌍으로 놓고 고민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 어색함 가운데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예술은 때때로 우리를 자극하고 도발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를 위로한다. 그 가치는 아마 변치 않을 것이다. 창작 방식과 매체, 그리고 감상 방법의 변화가 예술의 본질을 바꿀 수 있을까? 작품을 눈앞에서 마주하며 사소한 붓 터치, 물 흐른 자국 안에서 화가의 자신감과 망설임을 목격할 때나 콘서트장에서 악기 소리와 목소리가 벽과 천장에 부딪혀 울려 귀뿐만 아니라 머리털 하나 끝까지 전율하는 기분이 들 때와 같은 절절한 감각의 생동을 무엇이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과학의 발전이 이것을 나 아닌 기계가 대신 ‘느껴줄 수’ 있게 해준다 한들, 많은 것이 서글프게도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코로나19가 시나브로 만들어낸 오프라인과 온라인, 함께하기와 거리두기, 작품의 ‘아우라’와 모니터 속 쪼개지는 픽셀의 간극, 국경과는 또 다른 새로운 경계들, 그 어딘가에서 아름다움은 변치 않고 우리가 당도하기를 기다려줄 것인가?

김한결 중앙대 접경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참고 문헌
이지혜, ‘2020 코로나19 시대, 문화예술공간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 지속과 안전의 경계에서 문화예술의 대응과 대안에 관한 연구’, 서울특별시 청년허브 공모형 연구, 2020
서지혜, ‘코로나19는 예술기획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숭고미의 전시에서 삶과 예술의 상호적 감응으로’, <예술경영> 468호, 2021년 6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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