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팬데믹과 접경
② 코로나 시대, 국가와 민족의 ‘귀환’
③ 행성적 사이버네틱스
④ 국경여행, 경계에 선 삶들의 만남
⑤ 접촉지대에 산다는 것
⑥ 의료와 문학 접촉지대와 치유공간
2020년 초 코로나19는 중국의 일상생활에 상당한 균열을 일으킨 뒤 전세계로 퍼지면서 다양한 지역사회를 파괴했다. 2020년 3월1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를 팬데믹으로 규정했을 때, 110개국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서 11만8천 명 넘는 확진자가 발생했고 4300명 가깝게 사망했다. 그로부터 1년 넘게 흐른 현재, 필자가 원고를 쓰는 2021년 4월23일을 기준으로 전세계적으로 1억4500만 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됐고 3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사가 여전히 부족하고 확진자 수를 의도적으로 줄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코로나19는 공식 데이터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감염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생존자 수백만 명은 감염 뒤 수개월 동안 후유증을 겪는데, 이 증상은 약화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더 심해지기도 한다. 이들은 ‘코로나19 장기 투병자’로 부르는데 완치와 거리가 먼데도 치료받지 못한다. 그렇게 이들의 건강과 삶은 현저하게 변했다. 백신은 점점 더 이용 가능해지지만,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불평등하게 보급되며 신규 감염 속도를 따라잡는 데 실패했다. 코로나19의 영향은 민족, 인종, 사회경제적 지위와 직업에 따라 극단적으로 불균형한 양상을 보이며 공동체와 정체성 사이 경계와 장벽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코로나바이러스로 발생한 질환의 의학적 측면만을 언급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좁은 의미의 전 지구적인 보건 위기 그 이상임을 즉시 알아차렸다. 팬데믹이 선언된 지 3주 만인 2020년 4월6일, 유엔은 코로나19가 “인류, 경제, 사회적 위기”이며 “사회를 그 핵심부부터 공격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코로나19 발병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특히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인 사회집단의 구성원에게 해롭다. 빈곤층, 노인, 장애인, 청소년 그리고 원주민 같은 사람들에게 계속 악영향을 미친다. (…) 건강과 경제에 미치는 바이러스의 영향은 팬데믹과 그 여파에 불균형적으로 나타난다. (…) 코로나19 팬데믹은 또한 중장기적으로 불평등, 배제, 차별과 전세계적인 실업을 증가시킬 수 있다.”
지난 1년 동안 팬데믹으로 인한 인류와 경제, 사회적 위기는 처음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음이 드러났다. 특히 미국과 브라질, 인도를 포함한 상당수 국가가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파괴에서 보호할 수 없었다. 심지어 대놓고 바이러스 통제를 거부한 상황도 일어났다.
이런 때 ‘치유’란 가능할까? 좀더 구체적으로는 문학과 의학·보건의 ‘접촉지대’는 어떻게 치유의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약 30년 전 미국의 연구자 메리 루이즈 프랫은 접촉지대를 팽창하는 제국의 접촉 공간, 즉 지리·역사적으로 분리된 민족들이 서로 접촉해 강요, 극심한 불평등, 꼬여버린 갈등 상태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공간으로 규정했다. 이후 프랫의 이 용어는 필자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전역의 예술가들이 만든 접촉 공간을 살펴본 2009년 책 <이동하는 텍스트의 제국>(Empire of Texts in Motion)을 포함해 다양하게 사용됐다. 코로나 팬데믹 문맥에서 이 용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같이 극도로 불평등하며 항상 투쟁을 동반하는 상호작용과 연결의 공간”을 포착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내가 2020년 펴낸 책 <전 지구적인 치유: 문학, 지원, 돌봄>(Global Healing: Literature, Advocacy, Care)을 바탕으로 여기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접촉지대인 문학과 의학·보건 사이 접촉지대와, 그것이 치료가 없는 곳에서도 어떻게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생각해보려 한다. 우선 나병이나 에이즈, 치매 같은 질병을 앓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낙인찍히고 인간성을 말살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듯이, 수십억 명이 질병 자체뿐만 아니라 소속 공동체의 차별로 고통받는 세상에서 치유란 무엇이며 치유가 왜 중요한지 말하려 한다. 그리고 문학과 의학·보건의 접촉지대가 치유를 증진하고 행복감을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환기하려 한다.
전세계에 여전히 퍼져나가는 질병으로 육체·경제·정신·정서적으로 많은 것이 파괴되고, 흔히 인종·성·계급 차별이나 다른 형태의 차별에 근거한 질병에 대한 낙인과 편견이 인권침해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이 시대에 치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치유’와 ‘치료’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유와 치료는 서로 관련은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치료는 일반적으로 질병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흔히 의학적 처치로 이뤄진다. 반면 치유는 종종 ‘온전해지다’거나 ‘회복되다’라는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우리는 질병을 치료받아도 치유받지는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암 치료를 받았는데도 동료들이 그를 경멸해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치료 없이 치유받을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고칠 수 없는 지병이 있더라도 가족과 공동체에서 만족스러운 ‘위치’를 점하며 온전함을 느낀다면 치유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후자의 예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제는 코로나19 신규 확진을 막을 수 있는 다양한 백신이 있다. 그러나 아직 전세계적으로 소수 인원만 백신을 접종했고,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나타나 추가 감염을 막으려는 노력을 위협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일부 환자의 증상을 줄이는 치료법이 있기는 하지만 급성 코로나19에 대한 치료법은 없고 만성의 경우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질병에 걸린 것으로 알려진 약 1억4500만 명 중 많은 사람이 몇 주 이내나 몇 달 안에 회복됐다. 그러나 코로나19 통계에는 확진자와 사망자만 있을 뿐 수백만 명의 코로나19 ‘장기 투병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은 초기 감염시 거의 무증상을 보였지만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이 질병에 따른 광범위한 합병증을 겪고 있다. 2020년 7월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의 앤서니 파우치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바이러스 감염 뒤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이러스가 제거돼 회복된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그들은 여러 측면에서 몇 주 동안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일부 ‘장기 투병자’에게 백신은 일종의 치료제가 돼 증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대다수 사람은 운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대신 만성질환, 특히 많은 오해를 받는 류머티즘성관절염 같은 자가면역 상태에서 흔히 발생하듯이, 직장으로 복귀할 수 없는데도 환자들의 증상은 무시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만성 코로나19 질환은 환자와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에도 중대한 도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몇몇 사람은 만성 코로나19를 ‘잠재적인 제2의 팬데믹’이라 불렀다.
만성 코로나19에 대한 치료제와 효과적인 치료법은 여전히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발견돼 널리 이용되더라도 치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가족이나 다양한 인간관계, 더 넓게는 의료환경과 사회 전반에서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코로나19 이전에도 매년 수백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성 비전염성 질병은 정신질환과 마찬가지로 전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알츠하이머와 여러 유형의 치매는 인구가 고령화됨에 따라 향후 수십 년 동안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기후변화로 더 나빠질 수 있는 건강 상태나 건강에 유해한 환경 조건은 많은 고통을 불러온다.
그러나 사람들은 질병 자체의 육체적인 아픔으로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와 의료보건 전문가, 심지어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서도 극심한 고통을 얻을 수 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간병인을 포함해서 모두가 너무나 빈번하게 낙인찍히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는 제대로 치료되지 않을 때도, 치유를 촉진하고 복지를 누리도록 대우받을 수 있는 돌봄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연령, 계급, 민족, 성별, 인종, 종교, 성적 성향 같은 요인으로 이미 취약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혹하다고 할 수 있다.
문학과 의학·보건의 접촉지대, 즉 소설이나 시, 단편에서 회고록과 창작 논픽션까지 질병과 질환에 관한 모든 것을 읽고 쓰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치유의 기회가 됐다. 예컨대 일본 작가 미즈무라 미나에는 ‘노인 돌봄’이라는 종종 견디기 힘든 짐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며 “엄마, 언제 돌아가실 거예요?”라는 질문을 표지에 담은 소설 <어머니의 유산>(2012)을 펴내고 간병인에게서 편지를 많이 받았다. 미즈무라는 “소설로 인해 구원받은 느낌이었고, 자신의 엄마가 죽기를 바란 것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됐다고 거듭 전해 놀라고 감동받았다”고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암환자를 위한 시 워크숍 시리즈인 ‘부채선인장 시 창작 프로젝트’(Prickly Pear Poetry Project) 주최자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적인 과정은 정말로 치유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 상실과 임박한 죽음, 심지어 희망조차 마음에 남았어요. 시를 쓰면서 저는 이들 중 일부를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것들은 생각을 정리하는 걸 도왔어요.” 의사들 또한 문학이 그들의 삶과 진료 과정에서 만들어낸 차이를 분명하게 밝혔다.
환자를 더 잘 이해하고 치료할 수 있게 하는 것부터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에 중요한 ‘휴식’과 창조적인 배출구를 제공하는 것까지, 문학의 역할은 다양하다. 소록도의 나환자 병원을 다룬 한국 작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1976) 같은 문학작품은 병에 수반되는 고통의 정도가 병에 대한 사회의 반응 때문에 얼마나 직간접적으로 심화하는지 부각했다. 이런 서사는 사회와 개인이 건강 위기에 대비하고 대처하는 방법을 전환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을 드러냄으로써 치유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많은 사람이 문학과 의학·보건 분야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으며, 치료와 치유는 전적으로 발전된 의료기술과 약물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확실히 생명을 구하고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또 하나의 의학적 기적을 발견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가져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접근 방식은, 앞서 언급한 의료의 인간화는 말할 것도 없고, 불평등과 부당함의 근본적인 구조에 도전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오늘날에도 대부분 세계에서 수많은 건강 문제는 건강·복지 피해를 심화하는 사회·의학·가정적 반응을 촉발하며, 불관용이 관용되고 낙인효과에는 그 어떤 낙인도 찍히지 않는다. 이런 실상은 건강과 복지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더 강력하고 다양하며 지속적인 발화 필요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자축할 만한 많은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약자 지원, 돌봄 그리고 궁극적으로 전 지구적 치유라는 중대한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캐런 손버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동아시아 언어와 문명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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