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팬데믹과 접경
2020년 12월 중순,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는 영하권의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 재개선언 촉구를 위한 삼보일배에 나섰다. 비슷한 시기에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프로축구팀 강원FC의 신임 단장에게 북한과의 교류를 위해 북한 선수 영입을 고려해달라고 요청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봉쇄와 보호주의가 화두인 요즈음 연대와 공조를 통한 위기대응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다. 남북한 접경지대에 있는 경기도와 강원도는 연평도 포격이나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심리적 불안과 경제적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으면서도 남북문제에선 수도(京)의 주변부(畿)로서 주체가 아닌 객체로 머무른다.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는 자기가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지는 것처럼 스스로를 옥죄어왔다. 역사를 보면 국경은 중앙정부의 정책적 개입과 무관하게 자연히 생겨나는 초국경적 협력과 통합의 과정이 진행된 접경공간(Contact Zone)으로서 상호의존과 관용, 새로운 국가와 문명의 탄생 등 다양한 모습을 빚어낸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장소에 가까웠다.
실제로 높은 장벽을 쌓았더라도 동물과 인간 그리고 바이러스는 이웃한 공간을 넘나든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의 엄중한 상황 속에 접경지역의 양돈 농가들은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비무장지대(DMZ)를 뚫고 ‘남하’하는 야생 멧돼지들로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코로나보다 돼지열병이 더 무섭다’고 할 정도로 국경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멧돼지의 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야생동물만이 아니다. 2017년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위대한 장벽’ 건설을 추진했던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코로나19가 확산되자 하늘과 땅의 길을 막는 고강도 국경 봉쇄 정책을 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부터 엄격한 국경통제 정책을 강행한 미국이지만 바이러스 확산을 막지 못하고 세계 최대 방역 실패 국가로 전락했다.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시대는 우리에게 국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국경은 전통적으로 보호·단절·통제·차단 기능을 하는 배타적 선이자 주권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이해되면서, 반드시 수호해야 하는 신성한 경계선이요, 불통의 장벽으로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역사에서 국경을 성공적으로 봉쇄한 경우는 드물었다.
격리를 뜻하는 영어 ‘쿼런틴’(quarantine)은 ‘40일’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quaranta giorni’에서 유래했다. 이는 14세기 중반 흑사병(페스트)이 유럽을 휩쓸 때 항구로 들어오는 배의 선원들을 40일 격리한 데서 비롯됐다. 이런 강제격리 조처에도 당시 유럽 인구의 절반 정도는 흑사병에 희생됐다. 어떤 조처를 하든 국경 봉쇄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봉쇄는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국경 협력이 나날이 중요해지는 21세기 글로벌 사회에서 국경 봉쇄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반역이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앞에서 단절적·배타적 기능만을 강조했던 고전적 국경이론은, 국경이 갖는 접촉과 협력 기능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가적 감염병은 자국의 이득만 고려한 정책이 더 큰 혼란을 유발하고 이웃 나라와 함께 대처하는 것이 확산을 예방하는 지름길임을 새삼 일깨워줬다. 신·변종 감염병 같은 보건안보의 위협 요인을 감시·예방·대응하고, 질병 정보를 공유하는 다자적인 방역·보건 협력체를 구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국경 연구의 선구자인 프리드리히 라첼은 ‘영토가 국력이며, 국가는 생존을 위한 적절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처럼 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에 정립된 고전적인 국경이론은, 국경은 지속해서 팽창해야 한다는 진화론적 신념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는 국경의 단절적·배타적 기능을 강조한 나머지 국경이 갖는 결합과 접촉의 역사적 사실과 국경을 넘는 탈국가적·노마드(유목민)적 요소를 등한시하고 말았다.
“역사는 기억이 지시하는 대상으로만 존재한다”는 폴 리쾨르의 말처럼, 국경에 대한 일국사적 기억은 국경을 배척과 분쟁의 단층선으로 변질시켰다. 그 결과, 국경 지역의 시원적이고 배타적 전유를 위한 영토 순결주의가 기획되고, 관련 전시회와 기념식이 열린다. 근대국가의 욕망이 만들어낸 표상인 국경은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기제를 통해 발명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 놓인다. 동시에 대중의 동질성과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 과장과 왜곡된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역사가들은 국경의 평온한 일상적 삶보다는 갈등과 전쟁에 주목했다. 그래서 대치 속에 서로를 향한 증오가 팽배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는 작업 역시 국경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간과했다. 그곳은 이념 대립이 판치는 공간인 동시에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실험하는 장소였다. 지역주민들은 상호이해와 공존을 모색하면서 양자택일을 강요하기보다는 양자병합의 논리가 통용되는 야누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으로 전쟁과 평화를 상징)적 사고를 하는 창조적 공간을 형성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질적 세력이 조우하고 충돌하는 접경공간을 정합하는 실용적인 노선을 걷고자 했던 역사를 만들어낸다. 또한 이주와 이산, 결혼과 교류를 통해 한곳에 모인 이질적 문화들이 서로 만나 뒤섞인 까닭에 순수한 피와 문화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혼종과 공존의 공간이다.
상이한 개별 집단의 기억을 무기 삼아 벌어지는 ‘기억의 전쟁’을 이제 종식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 간의 공통 역사와 문화정체성을 확인하는, 국경을 초월한 초국가적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이 요구된다. 초국가적 기억의 장소를 발굴하는 작업으로 국가주의적 기억의 공백을 채우고, 민족국가의 날카로운 모서리로만 이해되는 국경에서 진행됐던 얽힘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궁핍한 현실에 대한 무기력감, 사회적 불안감은 오히려 국가 간 협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공동체적 연대의식으로 감염병에 맞서는 다양한 인물 군상을 그린다. 역사적으로도 16세기 후반 소빙하기의 도래와 생태계 변화로 ‘지구적 위기’(Global Crisis)를 맞은 잉글랜드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부유한 주민들에게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한 구빈세를 내도록 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구빈법 제정을 통해, 즉 일종의 ‘사회연대세’를 도입해 위기에 대처했다. 이처럼 기후변화와 지구적 감염병 유행은 공동체의 결속과 그 가치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1970년대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오염이 심각했다. 특히 대기오염도는 유럽에서 최악의 수준이었다. 당시 동독 지역에서 방류되는 막대한 폐수가 동·서독 접경지대의 공유 하천과 바다로 유입되면서 동·서독은 환경보호를 위한 포괄적 논의를 진행했고 ‘접경위원회’가 공유 하천 보호와 수자원 분야 협력, 초국가적 재해 방지 임무를 맡게 된다. 동·서독의 관계 중앙부처와 서독의 접경 4개 주가 참여한 이 위원회는, 국경 문제를 중앙정부와 접경지역 지자체가 협력해서 해결한 성공적인 사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상대방 국가에 오염의 책임과 배상을 요구하기보다는, 초국경적 협력으로 문제 해결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이 사례를 교훈 삼아, 중앙정부(중심)와 접경지역(주변)이 이분법적 대립이 아닌 협치 관계를 구축해 국경 협력의 물꼬를 트는 유연한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중앙정부가 한 방향으로 추진하는 하향식(top-down) 정책이 구체적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 인간과 국가가 설정한 경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넘나드는 팬데믹이 증명하듯이, 환경 앞에 국경이 있을 수 없고 접경지역은 일차적 피해자이자 당사자로 환경·사회문화적 이슈에서 국경 협력의 추진자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근대국가의 탄생 이후 접경지대는 정치·사회적 주변부로 머물렀지만, 자연생태계가 살아 있는 환경보전 지역으로서 민간인 접근 제한과 상대적으로 낮은 인구밀도 때문에 인간이 자연에 내포된 공간이기도 했다. 일부 국가는 이런 곳을 ‘접경지역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공동으로 관리한다. ‘죽음의 선’으로 불렸던 옛 동·서독의 국경을 녹색지대인 ‘그뤼네스반트’로 변화시키고(55쪽 왼쪽 사진), 냉전시대 ‘철의 장막’이 있던 동유럽의 국경지대가 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유럽 그린벨트 국경 협력(오른쪽 지도)이 진행된다.
한반도의 접경지대인 비무장지대와 북한-중국-러시아 국경 사이의 삼각 지역도 비교적 온전한 자연생태 경관을 유지한다. 생태학적 위기 시대에 요구되는 상호협력적 국경 정책을 통해 자연을 존중하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숲과 같은 자연을 인간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괴하면서 기후변화, 생태교란과 더불어 새로운 감염병이 등장했다. 코로나19를 비롯해 에이즈, 사스, 메르스 같은 신종 감염병의 75%는 야생동물에서 유래하는 인수공통전염병이다. 인간과 환경의 경계인 완충지대가 없어지면서 급속도로 전파된 이른바 ‘환경 전염병’인 것이다. 이제 국경은 군사적 방어벽이기에 앞서 인간 안보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공간이다. 국경을 맞댄 접경지역에서 환경 분야의 초국경적 협력을 공식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접경지역은 창조적 공간이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의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는 고전적 저서 <미국사와 변경>에서 “19세기 미국 서부 프런티어(국경)의 변화가 역으로 중앙 연방정부의 행정체계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터너의 프런티어 사관에 따르면, 서부 개척은 민족적 혼종성과 종파적 다양성을 가능하게 했고 여기서부터 ‘변경 민주주의’ ‘개척자 민주주의’가 탄생하면서 진정한 미국이 출현할 수 있었다.
역사적 사례는 또 있다. 서양의 중세 시대에 독일 동부 지역은 본래 다양한 슬라브 종족이 거주하던 땅이었다. 이곳으로 이주한 독일의 ‘손님들’은 야만적인 동화 정책을 밀어붙였던 역사도 있지만, 현지인과 협력해 도시를 건설하고 점차 잡거와 혼종의 독일-슬라브 접경을 형성했다. ‘슬라브화한 게르만 지역’(Germania Slavica)으로 불리는 이곳은, 19세기 독일 통일을 주도한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는 발판을 마련한 장소다. 비스마르크에서 제3제국으로 이어지는 독일 근현대사의 중심이 슬라브-게르만 혼혈성이 뿌리내리고 새로운 정체성이 창조된 접경공간에서 비롯된 것을 보면 역사에 영원한 중심과 주변은 없어 보인다.
변방을 변화의 공간으로역사적으로 접경의 창조성은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함으로써 주변 지역의 세력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아가 이들은 초국경적 연계를 구축하고 지역 간 협력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확립된 혼종화된 지역 정체성을 발판으로 위기 상황에 원숙하게 대처했다. 이런 이유로 신영복은 저서 <변방을 찾아서>에서 변방의 의미와 가치를 규정하며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로 인식되는 변방을 “새로운 중심이 되는 변화의 공간, 창조의 공간, 생명의 공간”으로 이해했다. 그는 변방을 새로운 가능성의 전위로 읽어냄으로써, 새로운 역사로 도래할 열혈 중심인 변방의 의미를 역전시켜야 함을 강조했다.
산업사회가 유발한 생태적 위기인 코로나19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생태적’ 거리 두기라는 과제를 던졌고, 새로운 통찰과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또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초국경적’ 코로나바이러스의 대확산은 국경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부각한다. 국경을 국가의 안보 이익만을 위한 분리와 배제의 전략적 경계선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협력의 공간으로 재성찰해야 할 때다. 감염병의 초국가적 위협에 맞서려면 접경지역 국가들의 신뢰와 연대의 정신, 그리고 책임 공유가 필요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국경 협력을 국경 주변의 천연자원과 산업 인프라(기반시설)의 공동개발에만 치중한다면, 이는 근대가 기획했던 국경 정책의 실수를 반복할 뿐이다.
차용구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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