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팬데믹과 접경
② 코로나 시대, 국가와 민족의 ‘귀환’
자본주의에는 일종의 ‘양가성’이 내재해 있다. 한편으로, 노동자에게는 국경이 있어도 대자본에는 국경이 없다. 삼성 휴대전화는 흔히 ‘한국 대표 상품’으로 거론되지만, 사실 삼성 휴대전화 전체 생산량 중 국내 생산은 6% 정도밖에 안 된다. 해외에서 생산하고 해외에서 파는 게 일반적이다. 결정권을 전적으로 자본에 맡기면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주요 요소인 자금·기술·노동력·자원의 국경을 넘는 이동은 더 빨라지고 그 폭도 커질 것이다. 물론 그 목적은 이상주의적인 ‘국제주의’가 아니라 이윤 극대화에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대자본조차도 성장할 때나 시스템 전체가 위기에 빠질 때는 최종적 보호막인 국가를 찾는다. 삼성을 포함한 한국 재벌들만 보더라도 국가의 특혜 금융 등을 빼고 그 성장을 논할 수 있을까? 나아가 한국 재벌 기업의 해외 생산·판매망의 원활한 운영은 세계 6위(2020년) 군사대국인 한국이라는 ‘신진 강국’ 외교의 핵심 목표가 아닌가?
이런 양가성이 있기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 역사에서는 진자운동처럼 대자본 본위 ‘국제화’ 시기와 국가 본위 ‘국가/민족주의’ 시기가 교체되곤 한다. 예컨대 1870~1914년은 ‘제1차 국제화’ 시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앞둔 당시, 서구 선진국들의 전체 자본금에서 해외투자가 차지하는 비율(32%)이 1990년대 말(28%)보다 더 높았다. 1914년 이전까지 적어도 유럽 안에서는 주민들이 비자뿐만 아니라 여권 없이도 이웃 나라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런 세계는 20세기 전반 제1차 대전과 대공황, 그리고 제2차 대전과 국가 단위 케인스주의(수정자본주의) 도입으로 종언을 고했다.
대략 1914년부터 1970년대 중후반까지 선진 자본주의권은 ‘국가화된 경제’ 시대였다. 국가 주도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한국에선 그 시기가 1997년까지 지속됐다.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신자유주의로 전환한 주요 핵심부 국가들의 탈규제 흐름이 맞물리면서 1970년대 말부터 ‘제2차 국제화’가 시동을 걸었다. 그 물결에 동구권이 휩쓸려 몰락하고, 한때 ‘단일민족 국가’를 자처하던 한국은 전체 인구에서 외국인 비율이 거의 5%에 이르는 다민족 사회가 됐다. 북한도 경제적으로 반쯤 열린 ‘장마당’과 ‘돈주’(신흥 부유층)의 나라가 됐다. 오늘날 세계의 거대한 돈의 흐름은 거의 1914년 이전 시기처럼 핵심부에서 (준)주변부를 향해 흘러나가는 한편, 수억 명의 이주노동자는 주로 핵심부를 향해 이동한다. 지금 전세계에서 타국에 사는 이주자 인구는 3억 명에 다가선다.
그런데 2008년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경제가 금융위기와 공황을 맞은 뒤로는 자본주의 체제의 진자가 다시 ‘국가 본위’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제조업과 일자리 주변부로의 이전은 경제성장의 주요 동력인 핵심부의 총수요를 위협하는 수준이 됐고, 거대 경제로 성장한 중국은 여태까지 미국과 유럽권의 전유물이던 지정학적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핵심부 지배층 입장에서 ‘제2차 국제화’는 이제 아편전쟁 이후 완결된 구미권 중심 세계 체제를 위협하는 ‘위험 순위’에 도달해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구미권 밖으로의 제조업 이전을 생존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구미권의 많은 노동자, 서민도 이런 생각을 공유했다. 경제적 지위는 달라도 ‘국적’과 ‘인종’ 혹은 ‘민족’을 공유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들은 많은 구미권 나라에서 ‘반(反)이민 동맹’을 맺었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고학력자 위주로 재편된 사민주의적 온건 좌파는 노동계급 상당 부분의 극우화를 막을 힘이 없었고, 급진 좌파는 고립된 소수에 불과했다. 프랑스에서는 약체화한 사회당과 공산당을 대신해 극우 국민전선이 새로운 ‘노동자 정당’이 됐다. 영국은 노동자 표의 힘으로 유럽연합 탈퇴를 선언했고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백인 소시민과 노동자가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배외주의의 파도 속에 1970년대 말 이후 ‘제2차 국제화’는 이처럼 2008년 이후 점차 막을 내리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세계화의 몰락은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한층 가속화했다. 1914년 때처럼 일정 수준의 국제화에 익숙해진 세계 시민은 그들이 국가 본위의 세계에서 산다는 사실을 돌연히 깨달았다. 세계보건기구(WHO) 등 초국가적 국제기구들은 실질적인 각국 방역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유엔도 거의 무용지물이었고, 방역은 오로지 개별 국가의 몫이 됐다. 국가에 의한 철저한 출입국 통제는 이제 ‘새로운 표준’(뉴노멀)이 돼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렇게 남을 것 같다.
그러나 국가 행정력과 의료 체계의 시험대가 된 코로나19 국면에서 서구 사회는 동아시아에 여지없이 패배했다. 핀란드와 아이슬란드, 뉴질랜드 등 소수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 구미권 국가에는 중환자실 병상도, 의료기기도, 확진자 동선을 확인할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중에서도 영리 중심 후진적 의료 체계를 가진 미국은 최악이었다. 자신들의 무능을 호도하기 위해서, 미국을 비롯한 구미권 국가들은 만만치 않은 경쟁 세력으로 성장한 코로나19 ‘진원지’ 중국을 상대로 포문을 열었다. 2020년은 ‘코로나의 해’이자 20세기 초반 그 악명 높은 ‘황화론’을 연상케 하는 ‘중국 혐오증’(Sinophobia)의 해로도 기억될 것이다.
한국에서 ‘혐중’은 주로 일베 같은 청년 극우나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몫이다. 한국인 사이에 퍼진 중국에 대한 비호감 수준(75%)은 덴마크(75%)나 영국(74%) 등 구미권 국가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웃인 만큼 한국의 주류는 중국에 매우 신중한 접근을 한다. 2020년의 미국은 달랐다. 트럼프 정부는 대놓고 중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지목하고 중국 공산당을 세계인의 ‘공적’이라고 천명했다. 1950년대 냉전 전성기 수준의 수사를 방불케 한다. 수사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인민해방군과 관계있는 것으로 의심받는 재미 중국인 연구자와 학생들이 추방 대상에 오르고, 1천여 명의 중국인 연구자가 ‘잠재적 스파이’로 의심받아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다. ‘민감한’ 연구, 산업 부문의 취직은 중국 공민뿐 아니라 재미 화교에게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처럼 ‘인종’에 의해서 일각의 재미 이주자 집단이 국가적 배제를 당한 것은 한국전쟁 시절 화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와 억압 이후 처음이었다.
사실 인종주의적 중국 배척이야말로 미국의 전통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국인 노무자 입국을 막은 미국의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은, 중국에서 지금도 서구 인종주의의 전형적 사례로 기억된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국가적인 ‘중국인 배척’이 백인 민간인에 의한 중국인 학살과 구타 등 폭력을 수반했듯이, 오늘날 ‘현대판 황화론’도 민간인에 의한 비조직적이고 산발적인 폭력 행사를 배태한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부터 나서서 ‘중국 바이러스’라든가 ‘쿵 플루’ 같은 인종주의적이며 자극적인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민간인의 폭력적 배타주의를 포용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미국에서 폭력과 폭언에 피해를 본 사람은 중국인만이 아니었다. 백인 인종주의자에게 ‘중국인’은 ‘아시아인’의 범칭처럼 됐다. 한 여론조사에서 절반 이상의 재미 아시아계 디아스포라는 ‘인종주의적 폭력의 급격한 악화’를 실감한다고 응답했다. 일본인 피아니스트(뉴욕)나 버마계 일가족(텍사스) 등 중국과 아무 관계 없는 다른 아시아 국가 출신 이주자들도 인종주의적 폭력으로 중상을 입었다. 아시아계 이민자가 비교적 많은 캘리포니아주의 여러 학교에서 베트남계나 한국계 학생들이 코로나 국면에서 인종주의적 왕따를 지속적으로 당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미국 전역 여러 대학에서도 아시아계 학생이 폭력과 폭언의 위험에 노출됐다. 미국과 유럽 현지 한국인도 상당히 높은 수위의 인종차별적 행위와 폭언에 자주 노출되곤 했다. 직접적인 폭력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지인의 불편한 응시 정도는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에서 사는 한국인치고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코로나19의 지구적 팬데믹은 여태까지의 국제 관계와 관행을 뒤집어놨다. 생각해보면 1978년 이래 중국의 초고속 성장 상당 부분은 바로 미국의 기술과 자금에 힘입은 바가 크다. 지금도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이야말로 중국 수출 물량의 16% 이상을 구매해주는 중국의 가장 큰 외부 고객이다. 재미 유학생 수만 봐도 한국인은 약 5만 명이지만 중국인은 35만 명 이상으로 1위다. 중국과 미국이 이처럼 지난 40년 동안 ‘커플링’, 즉 공생관계에 있었기에 트럼프 정부가 코로나 국면에서 시작한 ‘디커플링’, 즉 중-미 결별은 대단히 아프고 폭력적인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 이제 막 출범한 조 바이든 정부는 중국에 덜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백인의 반아시아 인종주의를 제어하는 쪽으로 수사와 정책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미국 군부와 안보기관, 그리고 주요 기업이 중국을 ‘경쟁자’나 ‘가상의 적’으로 여기는 이상 재미 화교를 비롯한 미국의 아시아인에게는 앞으로도 시련의 나날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국면에서 두드러진 민족주의 내지 인종주의는 꼭 이처럼 커다란 지정학적 지각변동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새로운 ‘국가 본위의 시대’가 도래하는 만큼, 기존 소수자 차별이 더 심화하는 경우가 흔히 관찰된다. 예컨대 외국인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의 뿌리가 깊은 일본에서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생계가 곤란해진 대학생에 대한 정부 지원금 지급 조건이 외국인 유학생은 내국인 학생보다 훨씬 까다롭다. 총련 계열 조선대학처럼 재일조선인이 다니는 학교는 아예 지원 대상에서 배제됐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끈질긴 차별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한국도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봐야 한다. 2020년 4월 서울시가 1차 재난지원금을 지급했을 때 다문화가족이나 영주권자에게는 한국 국민과 동일하게 지원했지만, 외국인노동자와 유학생은 배제했다. 서울시는 뒤늦게야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 권고를 받아들여 외국인 체류자에게도 재난지원금을 주었지만 논란이 적지 않았다. 외국인 혐오증이 한국 사회에도 상당히 퍼져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특히 미등록 외국인노동자의 코로나19 피해가 심각했지만, 세계 전체에서도 2020년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에게 ‘수난의 해’였다. 거주국의 차별과 강경해진 배외주의 분위기, 비좁은 주거 공간 등 여러 악조건이 겹치면서 세계 곳곳에서 대형 참사가 빚어졌다. 예컨대 싱가포르는 방역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대학생 중에는 확진자가 아예 안 나왔지만, 비좁은 기숙사에 갇혀 지내는 외국인노동자는 절반이나 코로나19 양성 반응을 보였다. 코로나19 확산을 막으려는 공장 폐쇄도 외국인노동자를 강타했다. 말레이시아와 타이에서는 외국인노동자 실업과 기아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인과 함께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국내의 인종적 소수자들이다. 그들은 경제력이 취약하고, 코로나19에 따른 경기 침체로 폐점 비율이 높은 소매업 등의 업종에 많이 종사하는데다, 감염 위험이 큰 육체노동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게다가 거주국 언어에도 능통하지 못해 감염에 쉽게 노출된다.
‘모범적 복지국가’ 노르웨이에서도 2020년 봄에 코로나19로 입원한 환자 중 소말리아 출신 이민자가 9%나 차지했다. 그들이 노르웨이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0.8%에 지나지 않는다. 즉, 소말리아 출신에게는 코로나19에 걸려 입원할 확률이 평균보다 10배 이상 높았던 셈이다. 저임금 노동자나 영세 상인인 소말리아 출신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밖에서 작업해야 했으니 그 피해 역시 컸다. 거기에다 노르웨이어 소통 능력이 낮은 사람이 다수인데도 노르웨이 방역 당국은 방역 정보 등을 소말리아어로 서둘러 번역할 생각이 없었다. 모든 주민에게 적어도 기본 생계를 보장해주는 북유럽에서도 코로나19로 인한 소수자의 수난이 적지 않았을 정도이니, ‘인종’과 ‘계급’이 거의 그대로 겹치는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에게 벌어진 참극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미국의 흑인만 해도 코로나19 감염률이 백인보다 3배나 높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촉매제가 돼 그 도래가 가속화한 새로운 ‘국경의 시대’는 아마도 앞으로 수십 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국가들의 인구 고령화 등의 추세에 따라 노동 이민도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팽배한 민족주의 분위기에서 차별과 배제에 노출된 ‘종족적 소수자’(Ethnic Minority·한 나라 안에서 인종·민족적으로 지배적 지위에 있지 않은 집단)들과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진보의 핵심 의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래야 1930~40년대 인류가 이미 경험한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동아시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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