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팬데믹과 접경
② 코로나 시대, 국가와 민족의 ‘귀환’
③ 행성적 사이버네틱스
④ 국경여행, 경계에 선 삶들의 만남
⑤ 접촉지대에 산다는 것
⑥ 의료와 문학 접촉지대와 치유공간
⑦ 과학과 미신의 경계에서
⑧ 중국-홍콩 체제의 변화
⑨ 옛 동·서독 접경과 DMZ 생태계
⑩ 보건 위기와 젠더 불평등
⑪ 그리스신화가 말하는 경계 허물기
트로이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어느 날, 그리스군 진영으로 역병을 실은 아폴론의 화살들이 쏟아진다. 전쟁 중에 그리스 왕 아가멤논의 전리품이 된 자기 딸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러 온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를 왕이 모욕해 내쫓았고, 이에 크뤼세스가 자신이 모시는 신 아폴론에게 복수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쉬지 않고 날아든 역병의 화살은 수많은 그리스 병사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리스의 용장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 앞으로 나간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하는 서양 최고(最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시작이다.
사제의 딸을 돌려줘 더 이상 병사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아킬레우스의 청을 왕 아가멤논은 받아들인다. 역병은 그친다. 하지만 또 다른 재앙이 그리스군을 덮친다. 크뤼세스의 딸을 돌려보내라는 청을 왕이 받아들였지만, 대신 아킬레우스의 애인 브리세이스를 그가 취했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분노한다. 그의 첫 번째 분노다.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나서기를 거부한다. 백전불패의 용사가 참전하지 않은 전투들에서 그리스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코로나19 감염병의 엄중한 상황이 1년을 훌쩍 넘어 이어지고 있다. 전리품으로 취한 여인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과 같이 이 역병을 단번에 해결할 묘책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시행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해법이 없다. 혹 마법 같은 방안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해도, 우리에게 또 다른 재앙이 닥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도 없다. 그 방안을 실행하는 우리가 지닌 욕심의 크기가 아가멤논의 욕심보다 작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일리아스>로 돌아가자. 아킬레우스가 없는 전장에서 그의 사랑하는 벗 파트로클로스도 트로이의 용장 헥토르의 창에 찔려 목숨을 잃는다. 아킬레우스는 분노한다. 그의 첫 번째 분노가 아군인 그리스군에 재앙이 됐다면, 그의 두 번째 분노는 적군인 트로이군에 재앙이 됐다. 아킬레우스는 홀로 적진을 유린하며 나아간다. 노도처럼 헥토르의 앞까지 돌진한다. 헥토르도 트로이 최고 전사이지만 아킬레우스 앞에서는 매를 만난 비둘기 신세에 불과하다.
단칼에 복수에 성공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주검을 끌고 본진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복수에 성공해도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슬픔이 치밀어오를 때마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주검을 말 뒤에 매달고 자기 곁을 떠난 소중한 벗 파트로클로스의 무덤 주위를 돈다. 죽음, 죽음 그리고 치욕적인 능멸. 비극은 멈출 줄 모른다.
자식의 주검이 능멸당하는 걸 지켜보던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애끓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한밤에 몰래 아킬레우스를 찾아온다. 아킬레우스와 그를 찾아온 프리아모스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사랑하는 아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를 부여잡고 프리아모스가 운다. 사랑하는 벗 파트로클로스를 헥토르 손에 잃어버린 아킬레우스가 원수의 아비 품에서 통곡한다.
홀로 있을 때는 울지 않던 아킬레우스가, 복수를 감행하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헥토르의 주검을 유린하는 데 집착하던 잔혹한 그가, 왜 원수의 아비 앞에서 우는가? 내가 가장 소중한 이를 잃어 슬픔을 이길 수 없듯이, 내 앞의 이 사람도 가장 소중한 이를 잃어 슬픔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내 슬픔이 나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전장으로 달려나가게 했듯, 프리아모스의 슬픔은 그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적의 막사로 숨어들게 한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얼마나 슬픈지’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네가 얼마나 슬픈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슬픔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이 슬픔이야말로 내가 너와 같은 인간임을 드러내는 징표임을 확인하는 순간 피아의 구별은 무너진다. 아킬레우스는 맘껏 운다. 불사의 존재이며 저승과 이승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신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 울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인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서로의 슬픔에 공감하며, 서로가 실은 같은 인간임을 확인하며, 서로를 가르고 있던 경계선을 한바탕 눈물로 지워버린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그의 눈물로 매듭지어진다. 역병을 그치게 할 수는 있었지만 재앙을 끝낼 수 없었던 분노하는 아킬레우스가 마침내 자신도 인간임을 확인하고 적마저 동정하고 연민하는 것으로 이 서사시는 마무리된다. 너도 그리고 나도 아파하는 인간임을 한바탕 눈물로 확인할 때, 하물며 적과도 화해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누구와도 공존할 수 있다.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자리에 더는 전쟁을 부르는 욕심도, 그 욕심이 부르는 분노와 역병도, 또 전쟁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문제 많은 이 땅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가 바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모든 경계를 지워 그와 함께하는 일이라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유대인 율법 교사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명령을 행하는 것이 바로 영생을 위한 열쇠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대체 내가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를 가리키냐고 그들은 예수에게 묻는다. 이 질문에 예수는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한다(누가복음 10:25-37).
어느 여행객이 강도를 만나 옷이 다 벗겨지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길에 쓰러져 있다. 쓰러진 자가 같은 유대인인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할 수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유대인의 종교지도자 제사장은 그를 못 본 척 피해 가버린다. 피 흘리고 쓰러진 자를 만질 수 없는 율법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또 다른 유대인 종교지도자 레위인도 그를 돕지 않고 지나친다. 하지만 유대인에게 이웃은커녕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는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자신의 기름과 포도주로 그를 치료한다. 그를 여관까지 데려가 맡기고, 자기 돈을 여관 주인에게 주며 치료를 부탁한다.
예수가 묻는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돼줬느냐?” 답은 명확하다. 피아를 구별 짓는 경계선, 종교적 계율이 쳐놓은 장막, 혐오의 벽을 허물고 자비를 베푼 자다. 또 예수는 말한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성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때로는 신을 기쁘게 하고자, 또 때로는 신의 화를 달래고자 희생 제물을 바치는 각종 종교가 고대 근동에는 가득했다. 어떤 종교는 타인을 인신제사(人身祭祀)의 제물로 바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 종교들 사이에서 성서는 신이 인간이 되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이야기를 그려낸다. 에페소서의 저자는 이 이야기를 화평인 예수가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물어 둘로 하나를 만든 이야기라 요약한다(에페소서 2:14). 나와 너 사이의 경계, 곧 막힌 담을 허물기 원하는가? 그래서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을 부르는 욕심도, 그 욕심이 부르는 또 다른 재앙도 그치기를 바라는가? 성서는 말한다. 타인을 제물 삼으려 하지 마라. 당신을 내줘라. 그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다.
신이 인간이 되기까지 낮아지고 또 스스로를 나무에 못 박아 문제의 뿌리를 해결하는 자기희생은 신에게나 가능한 경지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눈길을 고대 그리스 세계로 돌려보자. 테베에 역병이 돌고 시민들이 죽어갔다. 델포이의 신탁을 얻어, 즉 예언의 신인 아폴론에게 묘책을 구해 속히 이 역병에서 자신들을 구해달라 요청하려고 시민들이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 앞으로 달려온다. 고대 그리스 비극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첫 장면이다.
오이디푸스는 백성들이 자신을 찾기 전 이미 신탁을 구하고자 사신으로 크레온을 파견해뒀다. 곧 사신이 돌아온다. 신탁을 듣고 온 그는 역병을 그치게 하려면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자, 곧 나라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나라의 더러움이 대체 누구인지를 마침내 오이디푸스가 밝혀내는 과정을 이 작품은 그려나간다.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자는 오이디푸스였다. 그러나 라이오스로부터 테베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죽인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오이디푸스는 테베가 아닌 코린토스에서 살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코린토스 왕자로 알고 지냈다. 어느 날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할 자라는 신탁을 듣는다. 이 두려운 신탁이 이뤄지는 걸 피하려고 그는 아비와 어미가 사는 코린토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인 테베로 향한다. 그 길 위 어느 삼거리에서 한 노인의 일행과 시비가 붙었고, 시비 끝에 오이디푸스는 노인을 죽였다. 그 노인이 라이오스라는 것을 오이디푸스는 정말 몰랐다.
오이디푸스가 드디어 테베로 들어가는 문턱에 당도했다. 그런데 수수께끼를 내어 맞히지 못하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가 길을 막고 있었다. 테베로 들어가려던 수많은 사람이 지금껏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죽음에 이르렀지만, 오이디푸스는 쉽게 문제를 풀어버린다. 테베로 왕래하는 길을 막던 재앙이자 골칫거리인 스핑크스를 물리친 오이디푸스는 그 도시 사람들에게 구원이었다. 도시민들은 오이디푸스를 왕으로 추대한다.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자기 눈을 찌르고 역병을 멈추다테베의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려는 작업을 시작할 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실은 코린토스의 왕자가 아니라 라이오스의 아들, 즉 테베의 왕자였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기 전 라이오스는 아들이 자기를 죽이고 자신의 아내를 취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운명을 피해보려 했지만 부인 이오카스테의 배 속에 아들이 잉태됐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 왕은 양치기를 시켜 아이를 죽여버리라고 명한다. 마음 약한 양치기는 차마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코린토스의 양치기에게 넘긴다. 아들이 없던 코린토스의 왕과 왕비가 그 아이를 양자로 삼는다. 오이디푸스는 알지 못했던, 자신이 코린토스의 왕자가 된 이야기다.
테베의 선왕 라이오스의 죽음을 둘러싼 진상을 캐가는 과정에 불려 나온 양치기는 진실이 지금까지처럼 저 밑 어딘가에 묻혀 있기를 원하며 주저한다. 반면 오이디푸스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살인범이 바로 오이디푸스라는 게 점점 드러난다. 누가 범인인지 불현듯 눈치챈 오이디푸스의 아내이자 어미 이오카스테는 더 이상 살인범의 정체를 밝히려 하지 말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범인임이 명명백백해질 때까지 그는 나아간다. 모든 게 분명해졌을 때, 그는 자기 눈을 찌르고, 테베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한다. 도시의 더러움이 사라졌으니, 역병은 그칠 것이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에게는 도시의 역병을 해결해야 할 정치적 책무가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선왕 라이오스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친다. 회피하지 않고 진실을 밝혀낸다. 진실이 드러났을 때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내주고 도시의 역병을 그치게 한다. 자신의 노력을 다해 책무를 완수한다.
진실을 마주한 뒤 두려움 없이 자기를 희생해 도시의 더러움을 정화할 수 있는 건 영웅적 성품을 지닌 이에게나 가능하다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즉, 이러한 자기희생은 왕자에게 약속된 모든 영광을 뒤로하더라도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할 자가 되지 않는 길을 택할 수 있는 고결한 자에게나 허락된 경지라고 누군가는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희생으로 지금까지 코로나19와 싸워왔다. 신이 아닌 집 앞 카페 김 사장이, 신화 속 고결한 영웅이 아닌 방호복 속 의료진이, 저 텍스트 속 신처럼 또 영웅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이들이 있기에 반드시 이 역병은 그칠 것이다. 그 길을 막아선 모든 막힌 담은 결국 허물어질 것이다.
자기가 도시의 더러움임을 발견한 오이디푸스가 아무 말 덧붙이지 않고 스스로 테베를 떠나 도시의 역병을 그치게 했듯, 어떤 이유에서도 회피하지 않고 이 위기를 종식할 길 위에 자신의 노력을 다하는 숱한 영웅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막힌 담이 곧장 허물어질 것이라 단언하기에는 우리 안에 그어진 장벽이 너무나 많고 또 견고하다. 아시아인에 대한 숱한 혐오범죄 소식이 들려오는 저 태평양 건너편 나라로 눈을 돌리지 않더라도, 외국인만을 특정해 코로나19 진단검사를 받게 했던 차별적 행정명령과 그것을 꼭 빼닮은 지침이 반복된다는 소식만으로도 역병이 그친 세상에 우리 두 발을 다시 딛고 설 날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우리가 세운 경계가 더욱 짙어지는 건 아닌가? 필자가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오늘(2021년 7월7일) 코로나19 일일 확진자 수가 6개월 만에 1천 명을 넘어섰다. “확산세가 잡히지 않으면 거리두기 단계를 올릴 수 있다”고 말하는 저들도, 또 “당장 전면 봉쇄 수준의 조처를 하라”고 소리치는 이들도, 강도 만난 자처럼 쓰러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와 ‘쓰러진 저들’ 사이에 선을 긋고, 저들의 이야기를 저 아래 파묻으며 나의 안전과 안락만을 말하는 건 혹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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