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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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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아들도 신문 배달

신문 3개 보다가 하게 된 3개 신문지국, 기관장 아들들이 신문 돌리겠다며 찾아오고
등록 2021-07-15 19:55 수정 2021-07-16 11:51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1970년대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에서 문구도 파는 서점을 운영하던 우리 집은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세 가지 신문을 보았습니다. 워낙 좁은 바닥이다보니 신문지국장들은 우리 집 사무용품을 쓰는 단골입니다. 친하다고 신문을 봐달라는데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 신문 구독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신문 한 부 때문에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경향신문> 지국장이 친절하게 매일 찾아오더니 어느 날 남편이 <경향신문> 지국을 넘겨받았답니다. 우리 집이 신문지국을 시작하니 우리와 친한 사람들은 보던 신문을 끊고 우리가 하는 신문으로 바꿔 봤습니다. 좁은 바닥에서 경쟁한다는 것이 많이 미안했습니다. 신문지국을 하면서도 보던 신문을 끊지 못하고 그대로 봤습니다.

일일공부를 할 때 고용한 일 잘하던 아가씨가 결혼해 가까운 곳에 살았습니다. 우리가 신문지국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아직 결혼 초라 심심하니 자기를 써달라고 찾아왔습니다. 마땅히 관리할 사람이 없어 근심했는데 잘된 일이었습니다. 이제 새댁이 된 아가씨는 수단이 더 좋아졌습니다. 신문을 돌리는 아이들도 잘 구해왔습니다. 그 어려운 판촉도 곧잘 합니다. 시집 쪽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 신문 구독자를 많이 늘렸습니다.

신문지국이 잘된다 해도 별로 남는 게 없고 겨우 현상유지 하는 정도입니다. 하루는 <동아일보> 지국 아이들과 <경향신문>을 돌리는 아이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평소 <동아일보>를 돌리는 아이가 판촉하려고 많이 공들인 집이 있었는데 <경향신문> 돌리는 아이가 재빠르게 <경향신문>을 넣었다고 합니다. “이 새끼, 내가 한 부라도 늘려 학비에 보태려고 했는데 그걸 가로챘다”고 많이 화나 있었습니다. 자칫 신문 한 부 때문에 어른 싸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동아일보> 지국도 넘겨받았다고 합니다. 복잡하기만 하고 별로 이득이 남지 않는 신문지국을 또 하느냐고 했습니다. 남편은 “아니여, 두 개를 하면 서로 다툴 일도 없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돈이 벌릴 거여” 했습니다. 통장을 신문별로 따로따로 만들다보니 통장 개수만 점점 늘었습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은행을 뻔질나게 드나들게 됐습니다.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남편은 얼마 안 있어 <조선일보> 지국도 맡았습니다. 신문 돌리는 아이를 많이 써야 하는데, 아이들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학비를 벌겠다고 작심하고 나선 아이 말고는 자주 신문 배달원이 바뀌었습니다. 아무 연락도 없이 하기 싫으면 안 나오는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럴 때면 유치원 다니는 아들에게 가까운 곳 열 집을 돌리게 하고 나도 신문 배달에 나섰습니다.

오동나무 장 해서 시집 보내고 데려오고

한때 아이들 사이에 신문 돌리는 일이 유행처럼 됐습니다. 각 기관장 아들들이 돌아가며 신문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사회 체험을 해보고 싶은데 할 만한 일이 없어서 신문을 돌려보기로 했답니다. 처음 할 때는 어렵게 부모님 허락을 받았으니 1년 동안 열심히 일할 거라고 각오가 대단합니다. 하지만 석 달을 넘기지 못합니다. 기록을 세운 아이가 넉 달 했습니다. 어른들이 야무지게 사는 집 아이들은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하다가 그만두면 벌써 후임을 정해 구독하는 집을 다 파악시켜 인수인계를 분명히 해줬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누가 오동나무밭을 사라는데 사볼까?” 했습니다. “지금 돈이 어디 있어서 오동나무밭을 사나. 무리니까 한두 해 더 돈을 모아서 사자”고 했습니다. 남편이 “나도 그냥 할 소리가 없어서 지나가는 소리로 해봤어” 합니다.

며칠이 지나 남편이 오동나무밭을 구경 가자고 합니다. 살구실 산비탈에 있는 오동나무밭이었습니다. 돈이 어디 있어 샀냐고 하니 통장을 딸딸 긁어서 샀답니다. 신문지국을 세 개나 하는데 뭔가 그래도 자취를 남겨야 하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오동나무는 아름드리는 아니라도 품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컸습니다. 오동나무를 키워서 당신에게도 오동나무 장을 해주고, 딸이 둘이나 되는데 오동나무 장을 해서 시집보낸답니다. 며느리 데려올 때도 오동나무 장을 해줘서 데려올 거랍니다.

돈이 문제지 나쁠 것은 없었습니다. 월말이 되니 마감할 돈이 없습니다. 나보고 돈이 좀 없냐고 묻습니다. 내가 돈이 어디 있냐고 하니 남의 집 여자는 딴 주머니도 잘 찬다던데 돈 좀 꼬불쳐뒀다 비상시에 쓰면 얼마나 좋냐고 합니다. 그러는 자기는 돈 좀 꼬불쳐뒀다가 쓰면 안 되나,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냐고 소리치고 싸웠습니다.

결국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마감했습니다. 몇 달을 두고 갚아야 했습니다. 신문지국을 한 2년 하고 나니 그만두고 싶어졌습니다. 정리하고 싶은데 선뜻 신문지국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지국을 관리해주던 새댁이 자기가 맡아서 해보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가 받을 때보다 좋은 조건으로 새댁한테 넘겨줬습니다. 신문지국을 정리하면서 신문마다 만든 통장을 알뜰히 돈을 찾은 뒤 다 폐기 처분했습니다. 집 안이 많은 아이로 북적대다가 조용하니 아주 한가해졌습니다. 가게를 보다가 틈틈이 집안일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신문지국을 정리하고 한 달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서랍을 정리하다가 <경향신문> 통장 하나가 나왔습니다. 펼쳐보니 꽤 많은 돈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여러 통장을 쓰다보니 잊어버리고 다시 통장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 돈은 남편 몰래 내 비자금으로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결혼하고 처음 비자금이 생기니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 일주일을 입 닫고 혼자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돈 있으면 무얼 하겠냐” 자꾸 물어서

일주일이 지나니 자꾸 입이 근질거렸습니다. 남편한테 자기는 돈이 얼마가 있으면 무엇을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돈이 있으면 쓸 데가 없겠냐고 했습니다. 다음날 내가 또 물어보니, 왜 자꾸 물어보냐고 돈이 있냐고 했습니다. 돈이 있기는 어디 있냐고 돈이 없으니 그냥 답답해서 해보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자꾸 물어보니 남편이 눈치채고 돈이 있구나, 돈이 있으면 이실직고하랍니다. 결국 비자금을 챙기지 못하고 통장을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 돈은 오동나무밭을 살 때 빌린 돈의 남은 액수를 갚을 정도였습니다. 그날로 돈을 찾아 빚을 갚았습니다. 빚을 다 갚고 나니 그래도 신문지국을 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오동나무밭은 언제인지 급할 때 팔아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우리는 그 뒤에도 어려울 때마다 비자금도 챙길 줄 모른다고 서로 나무라며 살고 있습니다.

전순예 <강원도의 맛>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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