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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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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 타령하다 가해자 된다

분노조절장애나 사이코패스만이 가해자가 되는 게 아니라 괴롭힘이 허용되는 조직문화가 문제
등록 2021-06-29 06:03 수정 2021-06-30 02:02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업무 진행 상황을 공유해달라고 했더니 ‘네가 윗사람이야?’라고 화냅니다. ‘그래야 일할 수 있다’고 설명했더니 ‘이런 싸가지 없는 ×이 다 있어’라고 욕합니다.”

“잘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물어보면 말대꾸하지 말라고 짜증을 냅니다. 다 말대꾸라고 하면 일은 어떻게 배우나요?”

“업무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면 ‘이건 지시야’라고 말을 자릅니다. 조직에서는 지시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요.”

2021년 3~4월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2030 직장인들의 경험담이다. 자신만 꼰대인 줄 모르는 많은 4050 상사가 오늘도 ‘라떼’를 들먹이며 꼰대질을 일삼는 탓이다. 꼰대질은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며 상대방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 뜻을 밀어붙이거나,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과거 경험을 들이대며 새로운 시도를 가로막는 게 대표적이다. 상사들이 일부러 구성원을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은 아니다. 학교도 사회도 ‘군대’와 다를 바 없던 시절을 살아왔기에, ‘까라면 까’는 권위주의적 조직문화에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회식 강요로 생긴 위염, 3천만원 배상 판결

문제는 상사들이 변하지 않으면 직장 내 괴롭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자신이 2030 때 상사들에게 불려나가 술 먹고 새벽까지 놀아줬던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의 2030 직원들에게 술을 강요하는 식이다. 2021년 7월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1천 명에게 ‘직장갑질 감수성 지수’를 조사해보니, ‘팀워크 향상을 위해 회식이나 노래방 등은 조직문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항목에 50대는 긍정적이었지만, 20대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고용노동부가 2019년 2월 펴낸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을 보면 “음주, 흡연, 회식 참여를 강요”하는 행위는 직장 내 괴롭힘 예시로 명시돼 있다. 앞서 서울고법도 회식 강요로 위염, 불면증, 두통 등이 생겨 치료받은 여성노동자가 직장 상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3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직장 내 괴롭힘을 기업에 교육해온 이옥 변호사는 “성인지 감수성처럼 괴롭힘을 인지하는 정도도 세대 격차가 상당히 크다. (2030의) 달라진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지 않은 채 ‘라떼’를 내세우면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이나 미국의 직장 내 괴롭힘 조사를 보더라도 가해자의 80%가 관라자인데, 부적절한 경영관리 스타일이나 리더십이 괴롭힘의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분노조절장애나 사이코패스만이 가해자가 되는 게 아니라, 괴롭힘이 허용되는 조직문화가 문제라는 뜻이다. 영국의 반괴롭힘 운동단체는 “어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정책과 절차도 신뢰와 개방성이라는 일터 문화를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의전을 없애라, 지적 대신 질문을 하라

그렇다면 상명하복의 위계 조직을 상호존중의 수평 조직으로 바꾸는 방법은 무엇일까. 의외로 간단한 첫 번째 방법은 권위의 상징인 의전을 없애는 것이다. 의전이 철저한 조직일수록 권위적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 혁신적인 조직은 본질적인 일에 집중한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00년대 초 잭 웰치 제너럴일렉트릭(GE) 최고경영자가 전세계 GE 임원 500명이 모인 회의에서 연설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는데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성였다. 그때 임원들은 누구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저 구석에 빈자리가 있다”고 일러주기만 했다. 한국 기준에서 보면 회장 자리를 마련해놓지 않은 GE 직원이 ‘무개념’이지만 그들은 활발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문화에 초점을 맞춰 조직을 운영했을 뿐이다.

둘째, 지적이 아니라 질문을 해야 한다. 20년 가까이 회사에서 일하다보면 알려주고 싶은 게 늘어난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건 상사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왜 이리 지각이 잦지? 아침에 좀 일찍 나오면 안 되나?” 하나하나 지적하지만 효과는 없다. 귀로는 듣는 척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말이 바로 튕겨나간다. 변화를 시도하도록 돕고 싶다면 오히려 질문하는 게 낫다. “자꾸 지각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앞으로 늦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자기 입으로 결심을 밝히는 순간, 변화가 시작된다.

셋째,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일하는 직원은 상사의 장점과 단점을 대략 안다. 상사가 모른다는 걸 모든 직원이 아는데 상사가 아는 척하면 신뢰가 가지 않는다. 존경심도 사라진다. 모른다고 밝히는 게 오히려 친밀감을 높인다. 상사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넷째, 최소한의 거리가 필요하다. 허물없는 사이가 되면 상사 쪽이 더 편해지는데 업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심한 말이 튀어나와버린다. 감정 조절이 안 되기 때문이다. 감정코칭 전문가 함규정 씨앤에이엑스퍼트(C&A Expert) 대표는 “굳이 인격적 모독이 아니더라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낄 경우 반발심이 생긴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의도가 어땠느냐가 아니라,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다섯째, 우리 조직은 직장 내 괴롭힘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내용이 담긴 정책 문서를 만들어 발표한다. 이 선언에는 괴롭힘의 행위 기준이 담겨야 한다. 기준이 없으면 상황이 발생해도 어떤 기준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고 조사 절차를 밟아야 할지 알 수 없다. 어떤 행위가 구체적으로 괴롭힘으로 판단되고 무엇을 증거로 삼는지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직원의 이해를 돕고 인식을 향상시킬 수 있다.

개인 문제 아닌 ‘유해인자’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은 “직장 내 괴롭힘을 가해자나 피해자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직장 내 ‘유해인자’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직)문화는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를 토대로 구현되는데 괴롭힘이나 차별을 허용하거나 불용하는 것도 그런 사례로 볼 수 있다. 사업주는 소음이나 발암물질처럼 사회심리적 유해인자(괴롭힘·차별 등)로부터 조직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로 인해 건강 문제가 발생하면 산업재해로 보상해줘야 한다. 누구라도 피해자,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직장 내 괴롭힘을 예방하기 위해 교육 등 다양한 예방책을 펼쳐야 한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참고 문헌
<직장 갑질에서 살아남기>, 박점규 지음, 한겨레출판, 2020
<슬기로운 팀장생활의 기술>, 함규정 지음, 글담출판, 2018
<직원존중 주식회사>, 김철영 지음, 미문사, 2018
<일터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 류은숙 등 지음, 코난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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