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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사람이 살고 있는데… 김대원의 두 번째 기일에

등록 2021-06-20 16:40 수정 2021-06-24 08:4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얼마 전 만난 그는 집이 있긴 한데 없다고 했다. 살던 집의 계약이 종료되고 재개발로 동네도 텅 비었지만 이사 갈 집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밤이면 살던 집에 돌아가 눈을 붙이고, 아침이면 반쯤 폐허가 된 동네를 벗어나 서울역 광장 등지에서 나눠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에게 집이란 있지만 없는 것이었다.

스펙터클 뒤의 느린 폭력

공공임대주택에 들어와 6년의 다소 안정적인 집살이를 하기 전까지 나는 늘 부동산 직거래 사이트에 접속 중이었다. 어디에 괜찮은 집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했다. 서울에서 집값이 싼 곳은 오래된 다가구주택이 많은 동네였다. 구옥, 낮은 천장이나 약한 채광 같은 단점이 함께 왔지만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일로만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비비며 살 수 있었던 동네가 뭉텅이 사라지는 일이 근래 심상치 않게 번지고 있다.

골목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면 원래 동네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비싼 새 아파트에 들어갈 수 없는 대다수 세입자는 동네를 벗어난다. 한국의 개발사업은 집과 땅을 가진 이들, 새로운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이들에게 개발이익이 집중되는 구조다. 재개발 분쟁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덜 가진 이들을 꾸준히 밀어내는 조용한 퇴거는 사라진 적이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세입자 평균 거주기간 3.4년, 소득이 낮을수록 통근시간이 길어진다는 통계 속 숫자가 이들의 이름을 대신한다.

2009년 서울 용산4구역 개발에 따른 세입자 보상 대책을 요구하던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랐다. 경찰은 하루 만에 진압에 나섰고,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불타는 망루를 바라보며 애타는 목소리로 누군가 외쳤다. “저기 사람이 있는데.”

이곳에 오른 사람들은 레아호프, 공화춘, 진보당의 사장님과 이웃 동네의 철거민들이었다. 용산에서 타오른 화염이 개발 폭력의 스펙터클을 고스란히 보여줬다면 쫓겨난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하루하루는 느린 폭력이었다. 재개발 현장에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잠깐이지만 얻어맞고 쫓겨난 뒤 각자의 삶에서 견뎌야 하는 상실은 오래 지속됐다.

그래서였을까. 불타는 망루와 3년9개월의 옥살이에서 살아 돌아온 공화춘 사장님 김대원은 두 해 전 세상을 떠났다. 2019년 경찰과 검찰의 과거사위원회는 용산 참사에 대해 경찰의 과잉 진압과 검찰의 편파·부실 수사가 있었다고 인정했지만 재수사를 권고하지는 않았다. 잘못한 자는 있으나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참사 이후 ‘어딘가 꺾인’ 느낌이라던 김대원은 그해 세상을 등졌다.

용산 이후에도 불길은 꺼지지 않았네

쫓겨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다. 남은 이들은 ‘사라진 이들이 어디선가 잘 사시길 바란다’는 기원을 쉽게 하지만, 나는 그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뿌리 뽑히고 부정당한 이들은 어려워지거나 서러워졌다. 폭력은 화염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용산 이후에도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그 불길은 때로 용산 참사가 철거민 탓이라는 김석기·오세훈의 입으로, 용산 참사 구역의 땅을 매입해 16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긴 용산구 전 국회의원 진영의 모습으로, 서울의 구청장 평균자산 19억원의 모습으로도 반복됐다.

여섯 명의 죽음과 김대원의 억울한 옥살이에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원은 홀로 사과했다. “어쨌든 저는 살았잖아요, 돌아가신 분들과 유족들에게 미안해요”라고 말했던 김대원. 다가오는 6월23일은 그의 두 번째 기일이다. 김대원의 이름으로 흩어지고 쫓겨난 모든 이를 기린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가 ‘노 땡큐’ 필자로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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