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멤버이던 김용민씨가 2021년 1월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끝난 뒤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습니다. 어느 기자가 대통령에게 질문하는 내내 가운뎃손가락을 부자연스럽게 펴고 있었는데, 이게 대통령을 모욕하는 메시지 아니냐는 의혹 제기였습니다. 김씨는 여러 차례 실명을 거론하며 해당 기자에게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인지 묻기도 했습니다. 기자와 그의 동료들을 향해 “멘털리티나 수준이 당신과 다를 바 없는 기레기들”이라고도 했습니다.
수많은 팔로어를 거느린 김씨가 ‘좌표’를 찍자 누리꾼이 기자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으로 몰려들어 욕설 댓글을 달았습니다. 기자가 근무하는 통신사에도 막말을 퍼붓는 항의 전화가 쏟아졌습니다. 기자는 결국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계정을 닫아야 했고, 김씨에게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김씨의 페이스북에서 사과의 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사에 대한 비평을 넘어 기자를 상대로 한 ‘온라인 괴롭힘’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포털 뉴스의 악성 댓글은 예사입니다. 앞선 사례처럼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좌표를 찍어 집단공격을 하는 ‘트롤링’(Trolling)이 벌어집니다. 기자 신상을 털어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 전자우편도 보냅니다. 여러 해에 걸쳐 ‘학교폭력’ 못지않은 집요한 괴롭힘을 당하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기자들이 괴롭힘의 대상이 될까요? 사실을 왜곡하거나 취재 윤리를 위반한 기자들이 타깃이 되기도 하지만, 기사의 내용이나 지향이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는 이유로 기자를 공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컨대 특정 정파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거나 젠더·소수자 이슈를 다룬 기자들이 괴롭힘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여성 기자가 남성 기자보다 더 심한 공격에 시달리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기레기’니까 좀 혼나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도 인간이고 노동자입니다. 문자와 전자우편 폭탄을 맞고 나면 아무리 ‘멘털’이 강한 기자도 기사를 쓸 때 주저하고 움츠러들게 됩니다. 적잖은 기자가 번아웃(탈진)과 심리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트라우마를 호소하다 언론을 떠납니다.
온라인 괴롭힘의 문제는 기자 개인의 고통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유능한 기자들이 취재 현장을 떠나거나 할 말을 못하게 되면 사회 전체적으로 뉴스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같은, 민주주의 사회의 주권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끝내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지요.
달라진 언론과 시민의 역학관계온라인 괴롭힘에도 나름의 배경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정권과 금권의 눈치만 봤던 언론에 불만이 쌓인 시민들이 팔을 걷어붙인 거지요. 그런 점에서 언론의 반성도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기자 개인에 대한 집단 괴롭힘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실비오 웨이스보드 교수는 시민들의 집단공격을 ‘군중 검열’로 규정합니다. 국가와 자본이라는 중앙집중화된 권력이 저지른 과거의 검열과 구체적인 방식은 다르지만, 언론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지적이지요.
우리의 관습적 사고 속에 언론은 거대한 골리앗이고 시민 행동은 다윗의 돌팔매입니다. 따라서 힘없는 약자인 시민이 막강한 언론을 통제한다는 주장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언론권력이 맹위를 떨친 2000년대 중반까지는 분명 언론이 ‘갑’이고 시민이 ‘을’이었습니다. 약자의 조롱과 욕설은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로 보호해야 할 풍자가 됩니다. <딴지일보>가 보수 언론을 비판하며 즐겨 썼던 ‘씨바!’도 해학이 될 수 있었지요.
시간이 흘러 네트워크를 매개로 느슨하지만 강력하게 연대한 시민들은 촛불혁명으로 얻은 정치적 효능감과 소비자 권리에 대한 각성으로 거듭났습니다. 반면 포털과 유튜브에 독자를 빼앗긴 기성 언론은 예전처럼 여론을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언론과 시민의 역학관계가 달라진 겁니다.
시민 개개인은 언론 앞에서 여전히 약자이지만, 응집된 시민의 집합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닙니다. 이들은 개별 기자 앞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시민의 집합이 기자를 향해 내뱉는 조롱과 욕설도 기자를 침묵시키고 취재를 제약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The Elements of Journalism)은 언론 윤리의 교과서로 부르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저널리즘이 최우선으로 충성해야 할 대상은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시민 공중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공급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지요.
맞습니다. 기자는 자신이 봉사해야 할 대상이 자신을 고용한 사주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기자의 ‘충성’이 시민의 모든 요구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의사는 전문직으로서 환자에게 필요한 약을 처방할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환자도 의사에게 자기가 원하는 약만 달라고 요구해선 안 됩니다. 의사가 환자로부터 독립성을 가질 때 환자의 건강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기자와 시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자는 의사 같은 전문직이 아니지만 늘 전문직을 지향합니다. 전문직의 요건인 독립성을 갖출 때 시민에게 더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준전문직으로서 기자는 정치권력과 사주뿐 아니라 충성의 대상인 시민으로부터도 일정 부분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단기적으로는 시민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 시민의 권익에 기여하는 최선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기자가 일거수일투족을 간섭받지 않는 폭넓은 자율성 속에 자유롭게 취재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민들이 매 순간 자기 입맛에 맞는 기사만 쓰도록 기자들을 압박하고 언론을 힘으로 굴복시키려 한다면, 우리가 결국 얻는 건 시민에게 ‘충성’하는 언론이 아니라 ‘아첨’하는 언론일 겁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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