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난 백기완 선생은 인생 방향을 결정지은 기억을 말할 때 두 가지 일을 빼놓지 않았다. 첫째는 백범 김구를 만난 것인데, 해방 뒤 부친을 따라 고향인 황해도를 떠나 서울에 살던 1948년의 일이다. 백범은 15살 소년 백기완을 앉혀놓고 민족 통일을 논하고는 책에 시를 적어줬다고 한다. 둘째는 같은 시기 거리에서 또래와 주먹질하다 들었다는 말이다. “없는 사람들끼리 싸우면 코피밖에 더 나느냐.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과 하는 것이다.” 이 경험들은 가족이 한국전쟁으로 나뉘어 살게 된 일과 함께, 민족주의자이자 민중주의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원체험이 되었던 것 같다.
백기완 선생의 인생을 논하자면 장준하 선생과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장준하 선생은 서북 사람으로 학병으로 입대했다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애초 그의 영입을 시도한 것은 약산 김원봉이었다. 장준하 선생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이범석 휘하로 갔다. 이후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서도 활동했으나 이범석이 좌익을 받아들인 것에 실망해 곧 떠났다. 그러니까 이 시기 장준하 선생은 백범 김구와는 다른 대결주의적 반공주의자였던 셈이다.
아마도 갈 길이 달랐을 백기완과 장준하를 만나게 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이다.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겠다는 것은 5·16 군사정변을 긍정적으로 평했던 장준하 선생으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백기완은 광복군 이력을 높이 평가하며 장준하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만들자고도 했다. 그로부터 8년 뒤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장준하 선생은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라고 썼다. 장준하의 변화는 백기완과 바로 그 아랫세대인 6·3세대 젊은이들과 교류한 덕분이기도 했을 거다. 박정희 정권과 싸우면서 반일과 통일,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만난 것이다.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를 당했으나 백기완 선생은 멈추지 않았다. 10·26 사태 이후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당하면서도 시를 썼다.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도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1987년 대선에 출마해 양김 단일화를 촉구한 것은, 그에겐 반독재 투쟁의 연장선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최근까지도 “그때 내 말을 들었으면 군사독재도 청산됐을 것”이라고 했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백기완 선생은 그다음에도 거리에서 계속 싸우자고 했다. 그 시절 백기완 선생의 포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중년이 지금도 많다.
1992년 대선 완주는 진보정치로선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백기완 선생이 해방 이후 정국에서 좌익에 선 일은 없다. 그럼에도 ‘백기완선거대책운동본부’의 강령이 사회주의였던 건 모든 민중의 싸움에 함께하려 한 결과였다. 백기완 선생은 이후에도 모든 투쟁 현장의 앞자리에 서고 담장을 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글귀마저 그런 얘기였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진보는 독자적 당위를 가질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백기완 선생 빈소를 조문해 술잔을 올리고(사진) 유족들의 쓴소리를 들었다.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맡기고 훨훨 자유롭게 날아가셨으면 한다”고 한 만큼, 이 기회에 이 정권이 누구 편에서 누구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돌아봤으면 한다.
김민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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