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다시 대유행하며 학교들의 수업과 강의는 전면 온라인 원격 강의로 전환됐다. 다들 언제 끝나냐고 말하지만 사실은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다. 지금의 온라인 원격이 더 편하고 좋다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원격 강의가 강의의 질을 높였다는 평가도 많다. 학교들도 코로나19가 종식되더라도 온라인 원격을 ‘뉴노멀’(새 표준)로 받아들이고 준비한다.
뉴노멀이란 말처럼 코로나19로 온라인 원격으로 전환된 것은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 서로 어떻게 만나는지를 바꾸는 사건이다. 이전에 인터넷 강의 같은 게 있었지만 학교에선 완전히 새로운 일이다. 단지 학습 공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결속하고 서로 관계를 유지하는 결속의 성격과 과정, 그리고 그 효과까지 완전히 달라졌고 혼란한 가운데 익숙해져간다는 점에서 ‘사건’인 것이다.
온라인 원격 교육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이 가장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얼굴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배우는 사람에 대해 많은 정보를 준다. 일방적인 강의라고 해도 사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응답’을 듣는다. 재미있어하는지 알아듣는지, 모르고 있거나 관심이 없는지 등을 말하지 않더라도 표정과 몸짓의 응답을 들으며 강의를 진행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일방적인 강의조차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눈을 마주치며 강의를 진행하면 그건 ‘대화적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는 사람은 표정과 몸짓으로 응답하고, 그 응답을 읽고 가르치는 사람은 다시 배우는 사람에게 응답한다. 응답과 응답이 오가기 때문에 아무리 같은 내용으로 강의해도 모든 강의는 다 다르게 된다. 마치 연극이 똑같은 배우들이 똑같은 대본으로 똑같은 연출을 따라 해도 관객과의 호흡에 따라 매번 다른 것과 같다.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호흡을 맞추는지에 따라 내용과 감동이 달라진다.
따라서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의 현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큰 위기가 된다. 특히 대학에서는 화면을 켜고 얼굴을 보여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강의마다 다르지만 학생들이 화면을 꺼놓는 일이 많다. 그러면 가르치는 사람은 채팅창에 올라오는 반응을 보며 강의를 이끌어가야 한다. 교실이나 강의실에서라면 침묵하는 학생들까지도 표정과 몸짓으로 응답을 들을 수 있지만, 온라인 원격에선 채팅창에서 침묵하는 학생의 경우 그 응답을 들을 길이 없다. 당연히 강의의 흐름에서 이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들이 강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건 교육적으로 볼 때 큰 문제일 수밖에 없다. 교육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낸 사람들을 잘 이끌어가는 것만큼이나 침묵하며 드러나지 않는 학생에게도 응답해 배움으로 초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실 교육에 신경 쓰는 사람일수록 이들의 응답을 읽고 이들에게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온라인 원격 수업에선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를 감춰버리면 그 반응을 읽을 방법이 없다. 드러나지 않는 이들을 배움으로 초대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병렬적이고 즉각적이지 않은 대화온라인 원격에서 현장성은 다르게 구성된다. 채팅창이 활성화될 때다. 비록 얼굴은 드러나지 않더라도 강의실에서라면 절대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을 학생들이 좀더 편하게 채팅창에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에게 익숙한 소통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소통은 빠르게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그것도 시차를 두고 소통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문자로 대체됐다. 굳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문자나 SNS, 채팅으로 표정을 드러내는 것을 학생들은 더 편하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강의 시간에 말하면 강의의 흐름을 끊고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강의실의 공식적 시간에는 교수가 주도하는 한 흐름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학생은 아무 말이 아닌, 정제된 질문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강의실에서는 자신의 질문이 가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전에는 대부분 질문하지 않으려고 한다. 흐름을 깨고, 전체의 주목을 받고, 질문이 평가받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반면 채팅창을 통한 소통은 더 자유롭다. “맞아요” “ㅋㅋㅋ” 같은 단순한 반응부터 가볍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배우는 사람들끼리 서로 수다를 떨기도 한다. 게다가 여러 흐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응답 역시 즉각적이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지난 뒤, 가르치는 자가 적당한 때에 대답하면 된다. 이 때문에 채팅창이 활성화되면 강의실에선 표정과 몸짓으로만 나오던 응답이 좀더 넓게 나오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 더해, 학생들이 얼굴을 다 드러낼 때는 소통의 장점이 몇 배로 늘어난다.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강의실에서는 교수님 얼굴만 봤어요. 그리고 같이 강의를 듣는 친구들은 뒤통수만 봤지요. 그런데 온라인수업을 하면서 교수님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얼굴도 보게 되어 좋았습니다.”
모두 다 얼굴을 드러내는 강의의 경우, 교실이 명실상부하게 둥글게 앉아 얼굴을 마주 대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가르치는 자가 모든 관계를 ‘독점’하는 게 아니라 만남과 관계, 그리고 응답 과정 자체가 상호적이고 ‘민주적’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중요한 변화가 있다. 나와 함께 책을 쓴 응용언어학자 김성우도 지적한 것처럼, 온라인 원격 강의가 바꿔낸 것은 등교와 하교의 과정이 가진 ‘의례적 측면’의 소멸이다. 학교에 가는 것은 의례적 절차를 거친다. 일어나서 씻고 먹고 옷을 갈아입는다. 학교에 가는 동안 친구들과 길에서 만나 인사하고 수다를 떨고, 초·중·고의 경우 교문에서 교사가 학생들을 ‘맞이’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사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공간으로 나아가는 ‘의례’다.
이런 의례는 형식적이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이 의례를 거치면서 공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전환된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게 싫어도 이런 의례를 거치면서 그 마음은 학교에 가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의례는 그것을 수행하며 몸을 서서히 바꿔가는 일련의 전환 과정인 것이다. 공적인 공간의 존재로 전환하려면 일련의 의례 행위가 필요하며, 등교와 하교는 사람이 공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전환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온라인 원격 수업은 이런 일련의 의례를 일상에서 사라지게 했다. 한 학생은 등교해서 수업하는 날 “침대에 누워서 수업을 듣다가 학교에 와서 의자에 앉아 있으려고 하니 너무 힘들어요”라고 고통을 토로했다. 인간의 몸을 전환하는 의례의 과정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공적인 몸으로 전환하는 감각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행위자의 처지에선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매우 편한 것이겠지만, 공적 공간을 유지하는 형식과 그 형식을 수행하는 역량에는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
물론 이는 의례의 억압적 측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회는 공적인 공간의 형식성을 강요하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것을 통해 사람을 길들이고 지배한다. 대표적인 것이 등교와 하교 과정에서 강조되는 ‘학생다움’이다. 의례는 공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지만, 동시에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규범을 강조하며 권위적인 지배 질서에 길들여가는 과정이다.
어떤 의례가 만들어질까공적인 만남이 온라인에서 이뤄지고 은폐/엄폐가 가능해지면서 오프라인에서의 공적인 공간을 특징짓던 형식성은 필요 없어진다. 내 모습 전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기에 편리함과 동시에 다른 형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공적 공간의 형식성 자체가 무너지거나 변하고 그를 수행하는 역량은 지금과 또 달라진 모습일 것이다. 서로 지켜야 할 예의와 윤리도 변할 것이다. 따라서 의례가 없어지는 위기가 아니라 다른 의례를 만드는 역량이 무엇보다 필요해진다.
이 때문에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강의실에서 현장성을 잘 살리던 수업일수록 그것을 온라인으로 그대로 옮기려다가 어려움과 좌절을 경험한다. 반면 강의실에선 고만고만했던 수업이 앞에서 말한 온라인의 장점을 살리면서 평가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 이는 강의실에서 하던 대로 온라인에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두 공간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온라인 원격 수업은 그저 수업이나 강의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전환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 몸, 관계, 소통이 만나는 현장성이 다르게 구성되고 있다. 그에 따라 사람과 사람 사이 결속의 형식과 강도, 그 의미도 바뀌고 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윤리도 바뀐다. 코로나19를 통해 인간이라는 글자의 ‘간’(間) 자체가 지금까지 구성되고 유지되던 방식과는 전혀 달라지는 사건을 경험하고 있다. 학교와 강의실이 가장 그 앞에 있는 실험실인 셈이다.
엄기호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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