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2019년 4월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한국 사회에서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를 이루기 위한 한 걸음의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재생산’ ‘재생산권’ ‘재생산 정의’라는 말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정문 곳곳에서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의미를 설명하며 임신·출산·육아가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인 사례와 통계로 보여주고, 여성의 일과 건강 문제를 논했다. 또 임신·출산·육아에 장애가 되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적극적인 개선, 사회구조적 불합리 개선,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임신·출산·양육에서 평등과 정의의 문제까지 나아갔다.
헌법불합치와 단순위헌의 의견 차이
헌재 결정이 있은 지 1년6개월 정도 지난 2020년 10월7일, 정부는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정부안)을 입법예고하며 ‘헌재 결정 취지에 따라’ 형법의 ‘낙태죄’ 조항과 모자보건법의 ‘낙태 허용요건’을 개정한다고 설명했다. 정부안의 뼈대는 형법 제269조를 그대로 살려 원칙적으로 모든 임신중지를 범죄구성 요건에 해당하도록 규정하고, 새로 추가한 형법 제270조의 2에서 정한 허용요건이 있어야만 임신중지의 위법성을 없애주는 형식이다.
2019년 헌재 결정문 첫 장 ‘주문’(主文)이라는 제목 아래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다. “형법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은 모두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 위 조항들은 2020. 12. 31.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된다.” 이러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한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재판관 9명 중 합헌 의견을 낸 2명을 제외하고,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낙태죄 효력을 유지하는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4명의 재판관과 선고 즉시 낙태죄 효력을 상실시키는 단순위헌 의견을 낸 3명의 재판관이 그 이유를 밝혔기 때문이다.
헌법불합치 의견은 ‘결정 가능 기간(임신 22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이 기간 중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사유로 이루어진 임신중지를 처벌하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규정이라고 보았다. 반면 단순위헌 의견은 헌법불합치 의견과 견해를 같이하면서도 “‘임신 제1삼분기’(대략 마지막 생리기간의 첫날부터 14주 무렵까지)에는 어떠한 사유를 요구함 없이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숙고와 판단 아래 낙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헌법불합치 의견과 다르다고 했다.
몇몇 세부 쟁점에 관해서도 헌법불합치 의견과 단순위헌 의견은 서로 달랐다. 국가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고 보는 것에는 일치하지만, 헌법불합치 의견은 그 이유를 태아의 생명권에서 찾는 반면 단순위헌 의견은 ‘태아가 생명권에 대한 기본권 주체가 되는가에 관계없이’ 국가가 추구할 공익으로서 자명하다고 하여 태아의 생명권에 관한 판단은 유보했다. 헌법불합치 의견은 ‘결정 가능 기간과 사회·경제적 사유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에 관해 입법자가 입법의 재량을 가진다고 봤다. 하지만 단순위헌 의견은 헌법불합치 의견과 같이 조합(결합)의 문제로 볼 경우 “낙태의 문제는 다시금 임신한 여성에게 낙태를 정당화할 만한 사유가 있는가의 문제로 수렴하고, 그 결과 오로지 정당한 사유 유무에 따라 낙태를 허용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했다. ‘임신한 여성의 안전성이 보장된다는 기간 내의 예외적 허용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결과’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헌법불합치 의견과 단순위헌 의견 모두 형사처벌 실효성에 관한 의문과 형법상 제재의 한계를 상당한 비중으로 상세하게 인정했다. 다만 헌법불합치 의견은 ‘형사처벌하는 것 자체가 모든 경우 헌법에 위반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명시한 반면, 단순위헌 의견은 ‘태아의 독자 생존 시기 이후의 낙태를 원칙적으로 제한하고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 유지를 기대하기 어려운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임신중지 제한 방식을 형사처벌로 한정하지 않았다.
‘단순위헌’이라 한 내용을 법 안으로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헌재 결정의 기속력 범위다. 헌법은 국가의 최고 규범이기 때문에 법률의 위헌 결정이 법원이나 다른 국가기관을 기속(구속)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때 헌재 결정의 어떤 부분이 다른 국가기관을 구속하는가(기속력의 객관적 범위)를 정해야 한다. 헌재의 ‘헌법재판실무제요’를 보면 결정의 주문(법원 판결이나 헌재 결정 중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과 이유로 나누어 “결정 주문은 심판 대상에 관한 결정으로서 여기에 기속력이 미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고 해설한다. 그러나 “결정 이유에도 기속력이 미치는가에 관하여는 견해가 나뉘어 있다”고만 하며 우리 헌법 재판의 실무에 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낙태죄에 관한 헌재 결정과 같이 결정의 중요한 이유가 위헌정족수(6명)를 충족하지 못하고 4:3으로 나뉜 경우에는 다른 국가기관인 국회나 정부가 어떠한 결정 이유에도 기속된다고 볼 수 없다. 헌재 결정이 입법자인 국회나 법률안 제출권을 가진 정부를 규범적으로 구속하는 부분은 오로지 결정의 주문에 한정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부가 개정안을 만들면서 제출권자로서 일정한 재량을 발휘하였음은 그 내용에서 드러난다. 4명의 헌법불합치 의견이 제시한 결정 가능 기간(임신 22주)을 넘어 24주를 임신중지 가능 기간으로 정하여 헌법불합치 의견과 같은 기간을 정하지 않고 늘렸다. 3명의 단순위헌 의견이 제시한 ‘14주 내 임신한 여성의 요청에 따른 임신중지’도 추가로 정해 반영했다. 요컨대 정부는 헌재 결정 이유를 그대로 따르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입법 재량을 발휘한 정부안은 헌재 결정 취지에 맞는가. 결정 주문의 기속력에 따라 만들었는가.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정부안은 형법 제269조를 그대로 살려 원칙적으로 모든 임신중지를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도록 규정하고, 새로 추가한 형법 제270조의 2에서 정한 허용요건이 있어야만 임신중지의 위법성을 없애주는 형식(형법 이론에서는 ‘위법성 조각 사유’라고 한다)을 담았기 때문이다. 정부안에 의하면 형법 제269조의 낙태죄 조항은 문언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형법 체계상 임신중지는 원칙적으로 불법이고, 위법성 조각 사유가 인정되어야만 범죄가 되지 아니한다. 즉 임신 14주까지는 여성 요청이 있으면 허용하고, 이후 24주까지는 △성폭력에 의한 임신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친족 간 임신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여성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 피의자나 피고인이 된 여성이 위법성 조각 사유를 입증해야 한다.
‘낙태 불가피’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은
하지만 헌재 결정 중 단순위헌 의견은 임신중지 전부 금지의 법 형식의 문제점을 이미 정확히 설명했다.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기간 전체에 걸쳐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면서 다만 낙태가 허용될 수 있는 예외적 사유를 법률로써 규정하는 방식은, 그 요건을 충족하는 임신한 여성에게 ‘낙태가 불가피한 사람’의 지위를 부여하여 낙태에 대한 법률상 책임을 면제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고, 임신한 여성에게 자기결정권을 부여하지도 보장하지도 않는다. 임신한 여성은 임신기간 전체에 걸쳐 그 임신의 유지 여부에 관하여 스스로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지위를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하고, 따라서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기본권을 단 한 번도 보장받지 못한다. 이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그의 자기결정권을 부정 내지 박탈하는 것이다.”
법은 객관성과 중립을 지향하지만 법의 내용, 법 문언 바탕에 깔린 관념, 법의 실제 집행이 항상 객관과 중립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정부안 역시 다르지 않다. 여성의 임신중지는 언제나 예외 없이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한다. 임신중지는 원칙적으로 범죄인 행위이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위법성을 없애는 사유’(위법성 조각 사유)를 임신한 여성 스스로 입증하여 범죄와 형벌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정부안을 입법예고한 그다음 날(10월8일) 여성들이 들고나온 ‘우리는 처벌도 허락도 필요 없다’는 구호는 정부안의 핵심 전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헌재가 형법 제269조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선언했음에도 정부는 그 위헌성을 없애는 방법으로 임신중지의 ‘원칙적 금지-예외적 허용’ 구조를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임신 전체 기간 단 하루도, 어떤 경우라도, 헌재가 인정한 권리로서 임신중지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 정부안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처벌도 허락도 필요 없다
낙태죄가 형법에 들어온 지 67년 만의 개정이다. 임신중지 규율은 나라별로 같은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입법례를 보인다. 정부와 국회는 1970년대부터 형성돼온 외국의 과거 입법례가 아니라 국제적 수준의 최신 법, 현재 시점에서 최선의 권리보장법을 만들 수 있는데 입법 재량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법 개정 논의에서 지난 8월 법무부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가 발표한 ‘낙태의 처벌에서 여성이 평등·건강·안전·행복하게 임신·임신중단·출산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이를 통해 태아가 건강·안전·행복하게 출생·성장할 수 있는 여건 조성으로 법·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한다’는 권고를 가장 먼저 염두에 둘 것을 바란다. 우리는 정부안보다 더 좋은 법을 가질 자격이 있다.
차혜령 변호사·낙태죄 헌법소원 공동대리인단
*표지이야기-임신중단 정부안 반대, 4개의 시선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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