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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어린이날 생각

등록 2020-05-04 15:24 수정 2020-06-27 03:33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파란색 예쁜 우산이 가장 맘에 들었다. 어린이날을 앞둔 초등학교 교실 뒤편에는 우산 외에 크레파스, 스케치북, 공책 등이 쌓여 있었다. 마침 비가 내렸고, 선물받은 우산을 활짝 펴, 물건들이 젖지 않게 낑낑대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린이날이라고 해서 부모님 선물을 받아본 적 없었다. 학교에서 주는 선물만이 5월을 기쁨과 설렘의 달로 만들어줬다. 친구 부모님이 주신 거라는데 맘씨 좋은 어른이 많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선물의 가짓수는 줄고 규모는 커졌다. 선거라도 벌어지면 어린이날 선물을 줬던 학부모들이 다시 선물을 뿌렸다. 반장이 된 친구의 부모님 덕분에 생전 처음 햄버거를 맛봤다. 전교 어린이회장 형의 부모님이 복도에 정수기를 설치했다 했고, 그다음 해 회장의 아빠는 교실에 텔레비전을 넣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다. 어린이날 선물을 나눠주는 좋은 어른들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선물을 들고 집에 가는 발걸음이 마냥 신나지 않았다.

“돈은 있냐?”

어린이날이 유치하다고 느껴질 때쯤, 학생회-학부모-학교-돈의 관계가 눈에 들어왔다. 학생회에서 다루는 안건은, ‘쓰레기 잘 줍기’ ‘면학 분위기 조성’ 등에 불과했다. 맛도 영양도 부실한 위탁 급식을 직영으로 바꾸거나 두발과 복장 규제를 완화하는 등 학생을 위한 안건은 다뤄지지 않았다. 선생님의 통제 아래, 반장과 부반장이 진행하는 학생회 회의에 학생인권과 권익은 다뤄질 수 없는 안건이었다. 답답해하는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던진 말이 화근이 됐다. “네가 나가봐.” 학창 시절 반장은커녕,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도 수줍어하던 나는 객기 반, 정의감 반으로 고등학교 학생회장에 출마했다.

학생회장이 되겠다고 한 뒤 선생님에게서 들은 말은 “돈은 있냐?”였다. 보통 공부 잘하고, 학교운영비를 많이 내는 부모를 둔 학생이 학생회장이 된다. 대학입시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오랫동안 공들이는 분도 있다. 학생들 요구를 학교에 전달하고, 개선하는 역할을 하는 학생 대표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가치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이 당시에는 서운했지만, 지금은 이해된다. 돈 낼 능력도 안 되는 놈이 학생회장에 나섰다가 수모를 당하거나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가능성이 컸다.

나의 출마 소식은 학교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몇 년간 학교운영위원회를 운영해오던 학부모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학부모들은 우리 집이 너무 좁아 다 들어갈 수 없어 당황했고, 어머니는 그들을 근처 커피숍으로 데려갔다. “학생회장 한다는 것도 난 몰랐고 본인이 결정해서 한다는데 도와줄 수는 없어도 말릴 수는 없다.” 멋있다. 어머니 주머니에는 딱 커피값만큼의 돈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운이 좋게 당선됐고, 부모가 학교운영비를 한 푼도 내지 않는 학생회장이 탄생했다. 회장 부모도 안 내는데, 부회장 부모가 왜 내야 하느냐는 작은 소란도 있었다. 어머니는 이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가 내가 서른이 넘어서야 들려줬는데, 최악의 1년을 보냈을 학교 생각에 한참을 웃었다. 그러나 나의 1년은, 긴 세월 동안 이어진 관습과 세상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 작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괴짜 같은 개인이 아니라 변화를 함께 만들 동료와 집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잘해주지 못해 늘 미안하다고 한다. 어린이날 느꼈던 나의 서운함보다, 그가 느꼈을 부담과 미안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30대 중반의 어린이날. 나는 오히려 그에게 고마움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나와 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린이날이 부담스럽거나 미안한 날이 되지 않도록 각자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을 모든 이를 응원한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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