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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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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클로버-희귀병 투병기] 피를 뽑아도 울지 않는 아이들

두 대형 병원 소아청소년과의 풍경
등록 2020-04-11 16:14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희한하게도 병원에 가는 날을 예약해놓으면 머릿속 한구석에, 마음속 한구석에 ‘병원’이라는 용무가 무겁게 자리한다. 큰 병을 앓아 정기적으로 여러 병원에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는데도 그렇다. 한가하게 침대에 누워 뒹굴다가 퍼뜩, “다음주 월요일은 병원에 가는 날이지!” 하고 소리치며 일어난다거나, 아침 식사 자리에서 달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빠, 아빠” 하고 불러서 아빠가 “왜?” 하고 되물으면 “○월○일은 나랑 병원 가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여러 날 반복하는 식이다. 병원에 다녀오면 어떤 식으로든 일상에 전과 다른 점이 생긴다는 것을 아는 무의식이 표출하는 부담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형 병원 두 곳을 정기적으로 다닌다.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에는 2주에 한 번 다니다, 지난 1월부터는 한 달에 한 번 다니게 되었다.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는 혜화동의 서울대병원은 2월14일 처음 방문해서 이제 세 번째 진료를 앞두고 있다. 병원에 가면, 소아청소년과에서 진료를 받는다. 내 또래로 보일 만큼 큰 아이는 드물다. 대부분 갓난아기부터 내 허리께까지 오는 어린아이다.

진료에 앞서 나는 늘 채혈 검사를 받는다. 채혈이 잦은 탓에 혈관이 숨어버려서 팔꿈치 안쪽에 주삿바늘을 꽂을 만한 혈관을 찾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주변에는 안내나 수납 창구처럼 일렬로 조성된 서너 개의 창구에서 팔을 내밀고 있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 있다. 집 앞 병원에선 우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다. 몸을 이쪽저쪽 비틀며 “맛있는 거 먹으러 간다며, 아픈 거 아니라며!” 하고 병원이 떠나가라 떼쓰는 아이들과 달래느라 진땀을 빼는 보호자들을 보며 안쓰러웠고, 참 고생들 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갔을 때 서울대병원 희귀난치센터 어린이병원의 채혈실은 조용했다. 갓난아기를 제외하고는 주삿바늘을 피하며 우는 아이가 거의 없었다. 동네 소아과, 근처 대학병원을 거쳐 서울대병원에 와야 할 만큼 큰 병을 앓는 동안 혈액 검사는 예삿일이 되었다. 아이들은 무덤덤하고 익숙한 얼굴들로 팔을 내맡긴 채 앉아 있다. 안내에 따라 채혈한 부위를 꾹 눌러 지혈하면서 수납하러 간 보호자를 기다릴 때도 의연한 표정이다.

진료를 기다리며 대기할 때도 나는 무료한 시간 동안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아이들은 환자복을 입고 있지 않으면 알록달록하고 말쑥하게 차려입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조적으로 보호자들은 헝클어진 머리에 간편한 복장, 피곤하고 지친 표정으로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가방에서 서류나 필요한 물건을 꺼내거나 집어넣느라 정신이 없다. 한쪽 발에는 파란 물방울무늬 양말을, 다른 발에는 아무 무늬 없는 검은 양말을 신은 사람이 간호사실 앞에서 한 손으로는 아이를 어르고 귀로는 안내를 듣고 있는 광경을 본 적도 있다. 엄마는 “애가 아픈데 어떻게 정신이 있겠니”라고 말했다. 돌보는 아이가 아프면 다른 모든 것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아이가 아프지 않게 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고.

병원의 하얀 바닥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 있다. 그 바닥 속에는 현실 속 사람들이 발바닥을 맞대어 거꾸로 서 있다. 흐릿하고 얼룩덜룩한 그림자들을 보며 나는 병원에 오가는 사람들, 그들 각자의 사연과 무거운 한숨과 바쁜 발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지 생각한다. 바닥 속에서 뒤집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그림자들은 지금 그 사람들을 괴롭히는 걱정에서 다 벗어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을 하면서.


신채윤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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