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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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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양심’을 깨워라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운 지 일주일, 운동이 가르쳐준 것
등록 2020-03-31 21:24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프라이팬에 녹아 눌어붙은 치즈와 햇살 따사로운 날의 뚱뚱한 고양이 그리고 나. 우리는 몸을 바닥에 붙이고 늘어진 모습이 닮았다. 3살 많은 언니도 7살 어린 남동생도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촌 동생들도 몸을 재게 놀려 뛰어노는 것을 좋아한다. 한데 어떤 연유인지 내 피에는 게으름이 흐른다. 요즘은 아파트 단지 화단에 둘러친 회양목 사이사이로 벌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날이 잦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겨우내 움츠렸던 관절에서 뚜둑뚜둑 소리를 내며 하천가 산책로를 메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운동을 결심할 수 있는 걸까. 이제는 운동할 시기라고, 봄이 찾아와 속삭였나.

2월28일 소아류마티스내과 교수님을 만나 진료를 받았다. 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가족들은 의사 선생님에게 “얘 운동해야겠지요?” 하고 자꾸 물었다. 내 병은 전신 혈관에 염증이 생기는 병인데, 특히 심장에서 팔 쪽으로 나가는 대동맥이 염증으로 좁아져 있다. 다른 사람보다 쉽게 숨이 차고 유산소운동을 하면 손발이 차가워진다. 사람들은 내 병의 실체를 알고 하나같이 체육수업 못 해서 어떡하냐고 물었다. 나는 합법적으로 체육수업을 빠질 수 있는 핑계가 생겨 안도하고 있었다. 의무적인 운동이 나에게만 예외로 의무적이지 않게 된 것이 나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운동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는 게 좋긴 한데, 운동이라는 것은 결국 본인 의지니까요….”

봄은 익숙한 새로움의 계절, 환기의 계절이다. 구석구석, 겨우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엉덩이 무거운 먼지를 몰아내고, 방 안의 묵은 공기와 아직 볼을 차갑게 스치는 봄바람이 자리를 바꾼다. 우리 집도 창고를 정리했다. 물건을 분류하고 버리는 와중에 인라인스케이트를 오랜만에 꺼냈다. “이걸 타러 나갈 거야” 하고 언니가 벼르고 있길래 무심코 말을 얹었다. 나도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보겠다고. 난 인라인스케이트를 탈 줄 모르지만, 언니는 여섯 살 때쯤 제대로 배운 적이 있어 가르쳐주기로 했다. 선뜻 나서줄 거라 예상했지만 “네가 스스로 운동하겠다고 말하다니…” 하며 감격하는 언니를 보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오래전에 잠재운 운동 양심이.

3월3일 집 앞 하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걸어 인라인스케이트장에 갔다. 헬멧을 쓰고 무릎 보호대와 팔꿈치 보호대, 손목 보호대도 야무지게 챙겨 찼다. 첫날에는 넘어지는 법, 무릎을 잡고 둥글게 항아리 모양을 만들며 타는 법을 배웠다. 반년가량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던 대가로 근력을 잃었기 때문에 서두르지는 않았다. 둘째 날에는 눈보라가 간헐적으로 몰아쳐 발을 돌려야 했고, 셋째 날에는 발을 번갈아가며 뒤쪽 사선으로 밀면서 타는 법을 배웠다. 언니가 앞에서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 끌고 지켜보며 밀어주었다. 그다음 날부터는 체력이 허락하는 만큼 인라인스케이트장을 둥글게 돌며 탔다.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운 지 일주일이 됐다. 탈 줄 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속도를 빠르게 내지 못하고, 허리를 숙이고 없는 근육을 쥐어짠 탓에 허리가 아파 오래 타지도 못했다. 하지만 내 의지로 운동하겠다고 말했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고, 사흘 만에 그만두지도 않았다.

스스로 운동하겠다고 말하는 기염을 토하고 일주일 이상 실천했지만, 운동은 여전히 지루하고 의무적인 것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했다. 그래도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면서 몸의 회복 정도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었다. 퇴원 직후에는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병원에 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운동하면서 어제보다 조금씩 더 오래 움직이는 오늘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운동은 알려줬다. 내 몸이 아주 기특하게도 나아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신채윤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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