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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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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만원 노동자의 노래

등록 2020-03-23 10:05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82만원입니다.” 임대아파트 신청을 하고 소득기준을 놓고서 서울주택도시공사(SH) 쪽과 이야기하다가 들은 지난해 내 월소득이다. 주말에 맥도날드 배달로 얻는 82만원의 근로소득 외에 ‘투잡’을 뛰면서 얻은 배달대행 소득과 강연과 기고로 얻는 소득을 합치면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돈을 번다. 주말에도 일해야 평일에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다. 라이더들과 결성한 라이더유니온에서 활동비 5만원을 받는다.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에 투표해온

청소년 때부터 세상을 바꿔보자고 호기롭게 사회운동을 시작했지만, 최저임금보다 많은 돈을 받은 적이 없다. 물론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고, 돈 모아서 사고 싶은 것도 없다. 욕심이 있다면, 베란다가 있는 작은 임대아파트 당첨과 최저임금 정도의 돈을 벌어 더 많은 시민단체에 후원하는 것이다. 형에게 가족부양을 떠넘기고, 큰 병이 없는 사람의 한가함이리라. 당연히 주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기 일쑤다. 술과 밥을 자주 얻어먹는 것은 물론, 알뜰폰이라 100분 무료통화이다보니 전화 좀 해달라는 이야기도 자주 한다.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는 자의식에 취해 즐겁게 살고 주변에도 함께하자는 이야기를 뿌리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닫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민중운동,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고 말하기 힘들다.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처럼 투자를 받을 리 만무하고, 돈도 안 되는 일에 인생을 갈아 넣자고 말하기도 힘들다. 사실상 노동착취로 이뤄지는 시민사회운동을 함께하자고 했다가 욕이라도 먹지 않으면 다행이다. 소수의 유명 인사를 제외하면,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선배 활동가들도 찾기 힘들다.

오지 않을 좋은 세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친 선배 활동가들과, 사회운동에서 전망도 확신도 찾지 못한 청년 활동가들의 이탈 속에 진보정당의 국회 진출은 그나마 새로운 길과 희망을 제시하는 것 같다. 수십 년 동안 노조 활동을 해도, 조합원들은 들어보지 못한 진보정당보다 힘 있는 당에 투표하는 경우가 많다. 똑똑한 국민은 최악을 막기 위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힘 있는 차악에 전략적으로 투표해왔다. 판을 바꿔야 하는데 돈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권력과 돈이 있는 국회에 목맬 수밖에 없다. 세상을 바꾸는 데는, 치기 어린 활동가의 말보다 국회의원 배지가 더 유용해 보인다.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에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더라도, 이를 막기 위해 만든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에 소수정당들이 참여하는 것에 대해 쉽게 말하기 힘든 이유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만드는 데 인생을 걸어보자고 말할 수 있을까. 젊은 ‘386’ 유력 인사들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가겠다며 거대 양당에 들어갔다가 늙은 호랑이가 됐다. 당시에도 굴 밖에 사람은 있었다.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고 만든 소수정당들이 민주당의 위성정당에 합류한다. 양당제의 중력은, 소수정당의 궤도 이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뼈아픈 것은 능력 있고 재능 많은 인재를 여의도에 빼앗기는 것이다. 비례대표보다 매력적인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이 사태는 반복될 것이다.

매력적인 운동을 만들지 못하면

소수정당들이 선거연합을 할 수 있도록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 위성정당이 나올 수 없도록 선거법 개정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형식일 뿐이고, 양당제의 기득권을 뛰어넘는 대중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이 계속돼야 한다. 밭 갈고 씨 뿌리자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다시 할 수밖에 없다. 땅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는 한 새싹은 돋고 풍년이든 흉년이든 삶은 계속된다. 함께할 이웃만 있다면 얼마든지 넘을 수 있는 게 보릿고개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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