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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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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프면 일하고 가족 아프면 쉬라고?

현행법상 병가 규정 없지만 가족돌봄 휴직은 강행규정
등록 2019-05-11 13:57 수정 2020-05-03 04:29
2015년 6월7일 대전 서구 건양대학교병원 격리병동에서 의료진이 메르스 확진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2015년 6월7일 대전 서구 건양대학교병원 격리병동에서 의료진이 메르스 확진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오늘만 안 가면 안 돼?”라고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보채는 아이의 머리를 짚었다. 펄펄 끓는다. 머뭇거리며 회사에 전화를 건다. “아이부터 챙기라”는 예상치 못한 팀장의 위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뒤늦게 휴가 신청을 할 때에야 깨닫는다. 내 몸이 아파도 못 쓰던 병가가,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아이가 아플 때는 쓸 수 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22조의 2 (근로자의 가족 돌봄 등을 위한 지원) ① 사업주는 근로자가 부모, 배우자, 자녀 또는 배우자의 부모(이하 “가족”이라 한다)의 질병, 사고, 노령으로 인하여 그 가족을 돌보기 위한 휴직(이하 “가족돌봄휴직”이라 한다)을 신청하는 경우 이를 허용하여야 한다. 다만 대체인력 채용이 불가능한 경우, 정상적인 사업 운영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개인에게 가족 돌봄 떠넘길 땐 ‘쉬어라’

법이 말한다. ‘아이’를 돌봐라. 발언권은 근로기준법에 두고 있지 않다. 국가는 남녀 고용을 평등하게 하고,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법 취지 안에서 돌봄을 휴식으로 보장한다. 가족 돌봄을 공공 영역이 아니라 노동하는 개인이 책임지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평등과 양립이라는 말로 드러난다. 같은 법체계 안에 육아휴직을 별도로 둔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육아휴직을 유급 1년으로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보장하고, 아이의 나이도 만 8살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어떤 이유로든 돌봄을 위한 휴식이 개인의 노동‘조건’을 위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이 법 안에서 ‘나’가 빠진 돌봄의 대상은 배우자, 부모 등 가족 전체를 아우른다. 특히 부모는 ‘노령’도 휴직을 요청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기간도 적지 않다(연간 최장 90일). 주목할 대목은 더 있다. 가족 돌봄을 현실화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해뒀다. “사업주는 가족돌봄휴직을 이유로 해당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근로조건을 악화시키는 등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제22조의 2 4항)는 불이익 금지 조항이 그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휴직을 허용)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하여야 한다’로 돼 있다. 당사자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적용되는 ‘강행규정’이라는 뜻이다. 노동자의 휴가 신청을 거부할 수 없도록 아예 법으로 못 박아둔 셈이다. 대체인력 채용이 불가능하거나 정상적인 사업 운영이 불가능한 경우 등 예외를 두고 있지만 이 또한 업무 시간을 조정하거나 연장근로를 제한하는 등의 대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나아가 건전하게 직장과 가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게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규정까지 둔다. 나의 몸에는 그리 야박하던 국가가 직장과 가정을 위해서라면 심리상담까지 받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법이 아니라도 이미 현장에 녹아 있다. 법이 있으니 돌봄의 휴식(휴가·휴직 포함)이 각 기업의 취업규칙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다.

예외는 있다. 2016년 전 국민의 마음을 졸이게 했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집단 감염 이후에 만들어진 ‘감염병예방법’에서다. 병가는 없지만 개인이 걸린 병이 전염될 우려가 있다면,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셈이다.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41조의 2(사업주의 협조 의무)

① 사업주는 근로자가 이 법에 따라 입원 또는 격리되는 경우 근로기준법 제60조(연차유급휴가) 외에 그 입원 또는 격리 기간 동안 유급휴가를 줄 수 있다. 이 경우 사업주가 국가로부터 유급휴가를 위한 비용을 지원받을 때에는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

전염병에 걸리면 ‘쉬어라’

국가가 나서서 격리 기간을 유급휴가로 규정(국가가 비용을 지원하는 경우 유급휴가 부여는 기업의 의무)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한 사회적 목적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전염 위험성이 낮아 병원이 아닌 집에서 쉬는 경우(자가 격리)까지 ‘유급휴가’를 주도록 국가는 법으로 권장한다. 이는 급여가 보장되지 않으면 개인은 쉬기 어렵다는 사실을 국가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전염병이라고 무조건 유급휴가를 받을 수는 없다. 법령에는 최근 유행하는 A형 간염을 포함한 장티푸스 등 1~5군 감염병, 지정감염병 등 그 내용을 한정하고 있다. 노동자가 걸린 병이 법령에 있거나 보건복지부가 고시하는 특정 질환일 경우 감염병예방법으로 쉴 수 있다는 뜻이다. 전염에 대한 사회적 우려에 국가의 조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특정 질환의 경우 생활보호 규정도 두고 있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제20조 (부양가족의 보호) 특별자치시장·특별자치도지사·시장·군수 또는 구청장은 감염인 중 그 부양가족의 생계유지가 곤란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부양가족의 생활보호에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한 개인이 에이즈에 걸렸고 부양할 가족이 생계유지가 어렵다면 생활이 유지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겠다는 것이다. 결핵예방법 또한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결핵으로 입원 명령을 받아 격리치료가 요구될 때 부양가족의 생계유지 여부를 국가가 판단해 생활비 등의 지급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병에 걸려도 돈 걱정 없이 쉬려면 A형 간염이나 에이즈, 결핵 정도는 돼야 하는 현실, 내 몸을 위해서는 안 되고 가족을 이유로는 쉴 수 있는 역설을 해소하려면 어떤 경로를 밟아야 할까.

아프면 돈 걱정 없이 쉬어야

김수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원은 2018년 12월 펴낸 ‘질병으로 인한 가구의 경제활동 및 경제상태 변화와 정책과제’ 보고서에서 “의사 진단서 등 근거를 제시하고 휴직(휴가)을 요구했을 때 기업은 사업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 병가를 허용해야 한다. 또 병가를 사유로 회사로부터 해고나 불리한 처우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는 또 “나아가 병가기간을 마치면 휴직기간 전과 같은 업무나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직무로 돌아오고, 병가기간은 근속기간에 포함되도록 한다”고 했다. 국가가 가족 돌봄을 법으로 보장하는 만큼이라도 노동자 개인의 건강을 배려하라는 것이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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