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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혈관엔 한국인 피가 흐른다

예멘 난민 통역으로 활동했던 시리아 난민 아메드, 귀화 신청
등록 2019-04-17 01:54 수정 2020-05-02 19:29
아메드 라바비디 제공

아메드 라바비디 제공

“군대에서 널 찾고 있어. 다시는 돌아오면 안 돼.”

2012년 12월 한국에 온 시리아 난민 아메드 라바비디(26·사진)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시리아 정부군의 체포 대상에 포함됐다는 내용이었다.

아메드는 2012년 봄 대학생이 됐지만 캠퍼스의 낭만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알레포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며 엔지니어가 되는 꿈을 꿨다. 수업이 끝난 뒤엔 아르바이트로 컴퓨터 수리를 했다. 하지만 꿈을 이룰 ‘청춘’은 아메드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바람이 시리아와 그의 삶을 휩쓸었다.

죽고 싶지도 죽이고 싶지도 않아서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다라에서 학생들이 ‘재스민 혁명’에서 쓴 민주화 구호를 벽에 썼다가 체포됐다. 시민들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열었지만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해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30년 동안 시리아를 통치한 하페즈 알아사드가 2001년 숨졌지만, 아들 바샤르가 정권을 이어받아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평화시위를 폭력으로 짓밟은 알아사드 정권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시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전국적인 반정부 운동에 알아사드 정부의 무력 탄압은 더욱 노골화했다. 탄압에 반기를 든 일부 군인은 대열을 벗어나 반군에 가담했다. 국제사회는 2012년 6월 시리아 사태를 내전 상황으로 선언했다.

아메드의 고향인 ‘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에선 2012년 7월 말, 반군과 정부군의 교전이 시작됐다. 아메드는 교전 당시 목숨을 잃을 뻔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하루는 아메드가 알아사드 정권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데 정부군이 기습 공격을 했다. 도심 지역의 전기와 통신을 차단하고,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군인들이 총구를 겨누며 아메드를 뒤쫓았고, 하늘에서는 헬리콥터에 탄 군인들이 총을 쐈다. 주변에 함께 도망치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정부군은 어린이, 어른 가리지 않고 마구 쐈다. 아메드의 옷은 금세 벌겋게 피로 물들었다. 집 앞 건물로 쫓겨 들어갔는데 주민이 그를 숨겨줬다. 군인들의 추격을 가까스로 따돌리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면서 정부는 대학생들도 군대로 끌고 갔다. 아메드는 정부군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군대에 가면 시위대와 반군을 향해 총을 겨눠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했다. 죽고 싶지도, 죽이고 싶지도 않았던 그는 시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터키 국경과 알레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시리아를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가 잦았기 때문이다.

터키에 도착한 아메드는 한국행을 택했다. 자신보다 먼저 시리아를 떠난 남동생이 한국에서 중고차 수입 일을 하고 있었다. 몇 달 정도 머문 뒤 시리아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내전 상황이 격화돼 돌아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아메드와 동생은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2018년 봄, 예멘 난민 500여 명의 방문에 한국 사회는 화들짝 놀랐지만 수백 명 규모의 난민 행렬은 처음이 아니었다. 앞서 한국행을 택한 시리아 난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2011년부터 꾸준히 한국을 찾았으나 2015년 한 해에만 200명이 들어오면서 한국 정부는 시리아 난민의 입국 경로를 차단했다.

600만원 크론병 치료비, 인권단체가 도와줘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자료를 보면 2017년 12월31일 기준, 국내 체류 중인 시리아인은 1353명이다. 대부분 난민이다. 아메드와 같은 남성이 983명이고, 여성은 370명이다. 시리아 난민도 예멘 난민과 마찬가지로 젊은 남성이 많았다. 한국 정부는 시리아 난민 중 1200여 명에게 인도적 체류 지위를 부여했지만 법적 난민으로는 단 4명만 인정했다.

시리아 난민은 예멘 난민만큼 사회적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2015년 터키 해안가에서 엎드려 숨진 채 발견된 세 살 소년 알란 쿠르디와 2016년 알레포의 무너진 집 잔해 틈에서 발견된 오므란 다크니시의 사진이 보도되면서 국내에도 시리아 난민에게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아메드는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았다. 겨우 평화를 찾았나 싶은 그에게 또다시 큰 불행이 닥쳤다. 시리아에서 내전의 참상을 목격하고, 한국으로 떠나오는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그가 2013년 초 희귀 난치성 질환인 크론병(국소성 장염)에 걸린 것이다.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그는 장출혈로 쓰러져 큰 수술을 받고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문제는 600만원에 가까운 치료비였다. 인권단체가 기부 활동으로 돈을 모아줘 겨우 치료비를 낸 그는 퇴원 뒤 건강보험에 가입되는 일자리를 찾았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익숙하지 않았던 그는 틈틈이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지난해 500여 명의 예멘인 난민심사를 앞두고 아메드는 제주도 출입국·외국인청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제주도에서 아랍어-한국어 통역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메드는 “나 자신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예멘인들이 똑같은 어려움을 반복하지 않길 바랐다. 중동 사람인 내가 통역하면 예멘인들이 좀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메드는 지난해에 한국인으로 귀화 신청을 했다. 귀화 시험과 모든 법적 절차를 밟고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아메드는 “한국인이 된다면 시리아 난민 중에선 최초”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아메드는 최초의 ‘한국인’ 시리아 난민이 될 수 있지만, 제2의 아메드는 나올 수 없다. 개정 시행된 국적법에 따라 지난해 말부터 인도적 체류자는 귀화 신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씩 안정을 찾는 아메드와 달리 그의 조국 시리아는 아직 안갯속이다. 시리아 내전은 다른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벌어졌다. 대표적인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연맹’을 내세워 알아사드 대통령을 압박했다. 반면 시아파 국가로 분류되는 이란은 시아파인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했다. 이라크에서 생겨나 시리아로 유입된 이슬람국가(IS)는 최근 시리아에서 격퇴됐다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했지만, 정부군과 반군의 갈등은 아직 남아 있다. 아메드의 고향과 그리 멀지 않은 시리아 북서부 도시 이들리브에선 4월7일(현지시각)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져 민간인이 10명 넘게 죽었다.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사회복지사까지

아메드는 시리아가 아닌 한국에서 제2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국이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장출혈로 쓰러져 수술받았을 때 피를 15팩 넘게 받았다. 내 혈관에 한국인 피가 흐른다. 시리아에선 전쟁과 총성, 목격했던 죽음만이 기억난다. 한국에 올 때 나는 비로소 고향으로 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시리아에서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하나도 없어서 초등교육 검정고시부터 볼 계획이다. 귀화가 되면 한국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 26살의 아메드가 말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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