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난민기구(UNHCR)가 최근 발표한 연례 ‘글로벌 동향 보고서’를 보면 세계 곳곳에서 전쟁, 자연재해, 박해, 극심한 빈곤과 폭력 등 여러 이유로 고향을 등진 강제이주민은 7950만 명(2019년 말 기준)이다. 세계 인구의 1%가 넘는다. 9년 연속 사상 최대 규모를 경신했다. 이 중 3380만 명은 국경을 넘어 낯선 외국에서 피난처를 찾는 난민이다. 그 대다수는 시리아·콩고·예멘·이라크 등 분쟁 지역 출신이다.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시리아 난민에 대한 본격적인 구호의 손길을 촉발한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2015년 9월2일, 시리아에서 부모를 따라 그리스(유럽)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조난 사고를 당한 세 살배기 소년 쿠르디의 주검이 터키의 한 해변으로 떠밀려온 사진이 세계 언론에 보도되면서다. 바로 그날, 터키의 또 다른 해안에선 한국계 미국인 프리랜서 사진기자인 전해리(42) 작가가 그리스로 향하는 난민보트에 몸을 실었다.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온 식구가 목숨을 걸고 험난한 바다를 건너는 현실을 세상에 생생하게 알리려는 동행 취재였다. “이전까지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향하는 전쟁 난민들의 전체 여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두 날짜가 겹친 건 운명 같은 우연이었을까.
전해리 작가의 포토저널리즘은 2007년 미국 워싱턴 코코런예술대학(지금은 조지워싱턴대학에 통합)에 재학 중 파키스탄 지진 피해 현장을 무작정 찾아간 게 시작이었다. 이후 최근까지 아이티, 시리아, 이라크, 미얀마(로힝야족), 콩고 등 세계 전역의 분쟁과 인종학살 지역에서 난민의 참상을 생생한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해 전세계에 전했다. 세계 난민의 날(6월20일)을 맞아, 그는 6월17~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유엔난민기구와 주최로 ‘세계난민사진전’을 열었다. <한겨레21>은 22일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쿠르디가 발견된 날, 보트에 몸을 싣고
난민 사진에 관심 가진 계기가 있나.
“대학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하며 분쟁이나 재난 뉴스에 관심 갖게 됐다. 2014년 네덜란드에서 살 때 민간 난민구호단체 ‘케어’(Care)와 함께 요르단과 레바논의 난민캠프에서 활동하던 중 시리아 난민 친구를 통해 난민의 실상을 처음 알았다. 그는 늘 밝고 활발한 친구였는데, 알고 보니 이슬람국가(IS) 조직원들의 총격에 어머니를 잃고 임신 중이던 누나도 그 충격으로 아이를 잃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 시리아 정부군이었으나 살육을 거부하고 탈영한 사람을 난민캠프에서 만났는데 그가 난민보트를 직접 동행 취재해보라는 제안을 해 마음을 굳혔다.”
기억에 남는 작업은.
“2015년 9월 터키에서 바다를 건너 그리스를 거쳐 독일로 향하는 시리아 난민들을 동행 취재한 것이다. 또 하나는, 2016년 10월 유엔군이 IS 집단으로부터 이라크 모술 탈환전을 벌일 때 최선두에 섰던 쿠르드 민병대와 동행 취재한 것이다. 그때 바로 눈앞에서 쿠르드 병사가 총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전해리 작가는 이번 사진전에서 내놓을 60여 점의 작품을 추리면서 한장 한장에 담긴 사연과 상황을 또렷이 기억해냈다. 이라크 모술에서 IS로부터 간신히 탈출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한 소녀는 커다란 인형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고, 병원에선 서너 살쯤 된 소년이 할머니 품에 축 늘어진 채 응급 산소 공급을 받고 있었다. 시리아의 한 난민 여성이 위태로운 보트로 바다를 건너 그리스 레스보스섬에 도착하자마자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는 모습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전 작가는 “다분히 비정상적인 환경에서도 일상을 유지해야 하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현장을 누비면서 위험하거나 극적인 순간을 많이 경험했겠다.
“시리아 난민 동행 취재는 출발부터 항해, 촬영까지 전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내가 보트를 탄 곳은 레스보스섬까지 가장 가까운, 베흐람 인근의 해안이었다. 이스탄불에서 밤새 버스를 타고 출발 예정지로 왔는데, 난민 수천 명이 해안경비대의 감시를 피해 풀숲에 숨어 있었다. 브로커들은 작은 고무보트에 50명 넘는 사람을 빽빽하게 태웠다. 뱃삯만 1200달러(약 144만원)였다. 막상 보트가 바다로 나가자 촬영은커녕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보트는 작은 파도에도 크게 출렁였고, 레스보스섬을 몇㎞ 앞두고는 엔진이 멈춰버렸다. 그래도 우린 운이 좋아서 해안에 닿을 수 있었다. 많은 보트가 표류하거나 떠밀려가 비극적인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때만 해도 시리아 난민 사태가 그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상호의존적’
전 작가는 대학교수로 은퇴한 아버지가 미국에서 박사 과정 유학 중에 태어났다. 어릴 때 워싱턴에서 몇 년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초·중·고교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했다. 그 뒤 미국과 유럽에서 살다가 최근 귀국했다. 전 작가는 난민을 촬영하면서 내면의 경계가 흔들릴 때가 종종 있었다. “시리아 친구 2명과 이라크 친구 2명, 나까지 5명이 터키에서 독일까지 가는 일정을 함께했다. 난민들이 사진 촬영에 민감해하거나 거부감을 보이면 그들이 ‘괜찮다. 이 친구는 우리랑 함께 배를 타고 건너온 일행’이라고 나섰고, 난민들도 기꺼이 인정해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객관적 기록자로서 ‘거리 두기’와 내가 진짜 난민인 것 같은 ‘감정이입’이 뒤섞이면서 그들과 깊이 연결된 느낌이랄까.”
많은 나라에서 난민에 대한 시선이 여전히 싸늘하다.
“나라와 지역마다 다른 것 같다. 예컨대 내가 살던 네덜란드의 한 마을에선 ‘우리가 잘사니 인도주의적 책임이 있다’는 걸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자원봉사자도 많았다. 반면 동유럽이나 발칸반도 일부 국가는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난민들도 호의적 태도를 보이는 나라로 가고 싶어 한다.”
한국은 난민 인정률이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다.
“2018년 제주에 예멘 난민이 몰려왔는데 그 수가 500여 명이었다. 우리한테는 전례 없는 일이지만 다른 수용국들과 비교하면 극히 미미한 정도다. 한국전쟁을 겪은 뒤 우리도 난민 처지에 가까웠고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났다기보다는 국제원조의 도움을 받지 않았나. 누구도 완전히 ‘독립적’(independent)이거나 ‘의존적’(dependent)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이다. 우리나라도 세계 상위권 경제 수준에 걸맞은 성숙한 의식이랄까, 덕량을 갖추면 좋겠다.”
‘전국 순회전’으로 이어졌으면
전 작가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믿는다”고 했다. 그래서 바깥세상에 관심을 가진 포토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이 잘 맞는다고 확신한다. 취재 현장에서 느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순정한 마음이 좋단다. ‘품위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는 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다. “세계난민사진전을 전국 순회로 이어가고 싶은데, 비용을 충당할 돈이 없다. (웃음) 당장 확정된 건 없지만, 앞으로도 여건과 기회가 닿는 대로 분쟁 지역을 취재하고 싶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전해리 작가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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