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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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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을 묻지 말라

인권단체서 일하다가 에티오피아 정부 감시받은 베레켓

“투명한 선거로 새 국민대표 뽑히면 고국에 돌아가고파”
등록 2018-11-21 05:01 수정 2020-05-02 19:29
과 만난 에티오피아 난민 베레켓 알레마예후(39). 박승화 기자

과 만난 에티오피아 난민 베레켓 알레마예후(39). 박승화 기자

‘망명의 무늬’.

지난 9월 경기도 파주 헤이리 논밭예술학교에선 특별한 주제의 사진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에는 에티오피아 출신 베레켓 알레마예후(39)가 찍은 얼음 사진들이 걸렸다. 무채색의 얼음과 선명한 색상의 도형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사진이었다.

2014년 9월 한국 망명길에 오른 베레켓은 그해 겨울, 영하의 날씨를 처음 경험했다. 적도에서 멀지 않은 에티오피아는 열대기후여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았다. 그에게 한국살이는 처음 겪는 겨울과 같았다. 아는 사람이 없었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한국에 와 6개월이 지난 뒤부터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가구공장 등 여러 공장을 옮겨다녔지만 열악한 노동환경과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렸다.

“우리는 하나의 에티오피아”

이듬해 겨울, 경기도 고양의 한 시골마을에서 살던 베레켓은 마당에 두었던 대야 안의 물이 얼어붙은 걸 봤다. 그는 겨울 햇빛에 서서히 녹는 얼음의 무늬가 바뀌는 것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만든 얼음은 곧 베레켓 자신이었다. 그가 사진 찍어 기록하기로 결심한 이유다. 얼음 가장자리를 꿰뚫는 빛과 여러 색깔은 고된 한국살이에서 얻은 교훈과 조국의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고 베레켓은 설명했다. “한국살이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한국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은 내가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도 잊지 못할 것이다.”

“어느 부족 출신인지 묻지 마라. 한국에 망명 온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서로 어느 부족인지 묻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싫어 이곳까지 왔다.”

오로모족 출신인지를 묻는 기자에게 베레켓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자료에 따르면 에티오피아는 오로모족(34.4%), 암하라족(27%), 티그레족(6.1%)이 3대 종족을 구성하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80개에 이르는 언어와 부족이 있다. 1991년 이후 수가 적은 티그레족이 나머지 부족을 관리하는 통치 구조를 유지했다.

1991년은 에티오피아에 격동의 시기였다. 1974년 입헌군주제를 무너뜨렸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졌다.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의 멜레스 제나위 총리가 집권하면서 민주화가 실현되는 듯 보였지만, 제나위는 자신이 속한 티그레족에게 요직을 나눠주면서 또 다른 갈등을 낳았다.

2012년 57살의 나이로 사망한 제나위는 1991년부터 5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이후 17년 동안 총리로 있었다. 제나위는 생전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다. 하지만 베레켓은 제나위 정부를 ‘국가의 분열을 이용한 정부’라고 혹평했다. 그는 “1991년 기존의 나쁜 정부가 더 나쁜 정부로 대체됐고, 새 정부는 부족 간 갈등을 조장해 권력을 유지했다.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출신 부족을 묻는 것은 한국인에게 ‘경상도 출신인지, 전라도 출신인지’ 묻는 것과 같다”고 했다.

2005년 이후 노골화된 정부 탄압

2005년 5월 에티오피아의 민주화 이후 실시된 세 번째 총선에서도 제나위 쪽이 승리하자 통합민주연합(CUD) 등 야당에서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통합민주연합 지지자인 베레켓도 시위에 참가했다. 6월과 11월에 이어진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나위 정부군은 일반 시민에게 총을 쏘았다. 당시 사고조사위원회는 “2005년 시위진압 중에 193명이 학살됐다”고 언론 보도에서 밝혔다.

에티오피아와 한국을 잇는 숫자 ‘123’ 이후 정부의 탄압은 더욱 치밀해졌고, 노골화했다. 베레켓은 2007년부터 한 국제인권기구 에티오피아지부에서 일했는데 정부가 인권기구의 자금줄을 죄었다. 비정부기구(NGO)는 외국에서 조달하는 운영금이 전체 예산의 10%를 넘지 못하도록 법제화했다. 사실상 반정부 활동을 무력화한 조처였다.

언론의 자유 억압과 테러방지법까지 동원한 정부는 야당 지도자와 지지자들을 감시했다. 베레켓은 “정보기관들은 내가 외국의 누구와 연락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수시로 전화해 위협했다”고 말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에티오피아 정부가 국민의 인터넷 사용을 감시한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의 해킹업체 ‘해킹팀’은 2011년부터 에티오피아 정보기관의 감시를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9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인권콘퍼런스에 초대받은 베레켓은 한국에 와 난민 신청을 했다.

2018년 7월 말 기준 한국이 (법적) 난민으로 인정한 에티오피아인은 123명이다. 난민 인정자 수가 미얀마(268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에티오피아 군인의 수도 123명이다.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에티오피아가 유엔군 편에서 참전했다. 1951년 6천

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다.

베레켓은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이 무척 어렵지만, 에티오피아인은 다른 국가에 비해 많이 인정받은 편이다. 한국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렸던 역사적사실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엄혹한 시절은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국가를 떠나 난민이 된 사람이 2만5천 명을 넘고, 에티오피아 안에서 내분을 피해 떠도는 사람은 140만 명에 이른다.

올해 들어 작은 변화의 조짐은 있었다. 인민혁명민주전선의 하이을러마리얌 더살런 총리가 지난 2월 총리직을 내려놨다. 계속된 반정부 시위에 사실상 굴복한 것이다. 뒤를 이은 아비 아흐메드 총리는 언론 탄압을 해제하고, 민간 출신의 인사들을 장관직에 앉히는 등 개혁적 행보를 보였다. 아비 총리의 아버지는 오로모족이고, 어머니는 암하라족이다. 그가 군부 출신의 집권여당 총책임자임에도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기대하며 지지하는 이유다.

자유 에티오피아를 위한 ‘선거’

그러나 아비 총리의 인민혁명민주전선은 여전히 하원 547석 중 502석을 차지해 1당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에티오피아의 정치가 51% 지지만으로도 의석을 독식할 수 있는 구조라고 비판한다. 베레켓은 “다음 총선에서 투명한 선거가 실시돼야 한다. 국민이 선택한 대표가 다스리는 에티오피아가 되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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