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어요”

난민 인정받지 못한 이집트 청년 오마르

“나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등록 2018-10-13 09:18 수정 2020-05-02 19:29
서울 용산구 이슬람 중앙성원(모스크) 앞에서 노숙 중인 이집트 난민 오마르가 10월8일 오후 모스크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박승화 기자

서울 용산구 이슬람 중앙성원(모스크) 앞에서 노숙 중인 이집트 난민 오마르가 10월8일 오후 모스크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박승화 기자

2013년 8월14일 아침 6시30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라바 광장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총기로 중무장한 군인과 경찰은 동틀 무렵부터 광장에 모였다. 불도저와 장갑차도 보였다. 인근 건물 옥상에는 저격수도 배치됐다. 군경 2만2천 명은 광장과 연결된 네 개의 도로를 모두 차단한 다음 진격했다. 경고 방송이나 해산명령은 없었다. 시위대의 농성용 천막은 전진하는 육중한 중장비 아래 힘없이 깔렸다.

카이로 광장 시위에 가족 참여

“탕탕!” 이윽고 군경은 최루탄과 총을 쏘기 시작했다. 광장은 순식간에 총성과 비명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됐다. 오마르(26·가명)는 “총을 쏘지 말라”고 외치며 도망쳤다. 광장에 함께 온 형과 남동생, 아버지와 뿔뿔이 흩어졌다. 옆에 있던 한 중년 남성의 이마로 들어간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는 걸 본 오마르는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모든 생각과 감정이 멈췄다. ‘신이시여,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오마르는 너무 놀라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군경은 점심 무렵 잠시 사격을 중지했지만 오후 2시부터 재개했다. 늦은 오후까지 계속된 총격으로 광장에는 주검이 즐비했다. 일부 시민은 죽은 척하며 주검들 사이에 누웠다. 국제인권감시단체(Human Rights Watch)는 이날 총격으로 최소 817명의 무고한 시민이 숨졌다고 보고했다. 부상자도 4천 명에 이르렀다. 이는 인권감시단체가 파악한 인명 피해 최소치다. 실제로는 사망자가 1천 명이 넘을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사격이 멈춘 뒤, 시민들은 광장을 헤집고 다녔다. 가족과 친구의 주검을 찾기 위해서였다. 오마르는 나머지 가족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며 주검을 찾던 중 형과 마주쳤다. 곧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아버지는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아버지 없이 집에 돌아온 형제를 본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족은 아버지가 죽었을 거라고 체념했다. 아버지는 이틀 뒤 전화로 살아 있음을 알렸다.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집으로 돌아왔다.

가짜 여권으로 이집트 출국

“이때부터 삶이 내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나는 줄곧 도망치는 삶을 살았다.” 이집트에서의 일을 설명하는 오마르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2011년 이집트 혁명으로 30년 호스니 무바라크 독재정부를 끌어내린 경험이 있던 오마르와 가족은 자기 손으로 직접 뽑은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이들은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 무슬림형제단은 아니었지만 압둘팟타흐 시시 국방장관이 주축이 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해 평화시위로 맞섰다.

시시 군부의 탄압은 점점 노골화됐다. 집회·시위 법을 뜯어고쳐 쿠데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오마르 주변에는 군부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실종됐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라바 학살’ 이후 반정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오마르 가족도 계속 군부 쿠데타 규탄 시위에 참가하러 광장에 나갔다.

2014년 여름에는 오마르와 가족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오마르는 집을 떠나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가족은 흩어졌고, 비참한 생활이 이어졌다. 수시로 노숙을 했고, 남들이 먹다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먹기도 했다. 2015년 아버지와 남동생이 경찰에 붙잡혔다. 아버지는 석방과 구금을 반복하며 현재까지 도망 다니고 있다.

오마르는 2016년 이집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목적지는 스웨덴이었다. 2011년 이집트 혁명과 2013년 라바 광장 시위에 함께한 친구가 스웨덴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수배자가 된 오마르는 다른 사람의 명의로 발급받은 가짜 여권으로 이집트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웨덴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2017년 터키에서 그리스를 통해 스웨덴으로 가려 했지만, 그리스 국경에서 수차례 입국을 거부당했다.

이집트 난민 오마르(가명)이 이태원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이집트 난민 오마르(가명)이 이태원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도망치는 삶에 너무 지쳤다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하면 아마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정보를 찾아볼게.”

터키에서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오마르는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2018년 1월 한국에 온 오마르는 난민 신청 서류를 제출했다. 가짜 여권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압수당했다. 오마르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아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마르는 친구가 알려준 대로 난민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난민지원단체를 찾아갔다. 석 달이 지나, 오마르는 거처에서 나와야 했고, 서울 용산구 이슬람 중앙성원(모스크)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한국 정부의 난민신청자 생계 지원은 미약하다. 체류 기간이 여섯 달이 넘지 않아 오마르는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난민불인정결정통지서’가 날아든 건 8월 말이었다. 모스크에서 5개월 가까이 노숙하며 버틴 오마르는 큰 충격에 빠졌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순식간에 한국은 지옥이 됐다.”

모든 길은 사라졌다. 여권을 빼앗겨 한국을 떠날 수도, 일을 할 수 없어 한국에 머물 수도 없다. 그는 출입국·외국인청에 가 따져 물었다. 출입국청은 비행기표를 사오면 가짜 여권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오마르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 터키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다시 그리스 접경으로 가서 스웨덴에 가려 했다. 될 때까지 시도해보고 안 되면 죽어버리려고 했다. 나는 도망치는 삶에 너무 지쳤다.” 오마르는 절박했다. 그런데 이번엔 네덜란드 국적기 항공사가 발목을 잡았다. 항공사는 오마르가 경유지인 암스테르담에서 난민 신청할 것으로 보고 탑승권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항공권 비용은 환불받지 못했고, 여권은 다시 빼앗겼다. 9월 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주말에 큰비가 내렸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오마르는 해가 진 뒤 모스크가 문을 닫으면 모스크 앞 현관에서 담요를 덮고 잠을 청한다. “밤에는 손가락이 오그라들 정도로 춥다. 너무 추워 좀처럼 잠을 이루기 어렵다.” 오마르는 모스크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형은 전화로 “죽음은 신의 뜻이 아니다. 끝까지 살아야 한다”고 오마르를 다독였다. 오마르는 난민을 돕는 한 공익법단체의 도움을 받아 난민 불인정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한국을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다. 난민으로 받아주지 않을 거라면 내가 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 감정과 생각을 잃어버렸다는 오마르가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