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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지향 바꿀 생각 없어요?” 무지한 난민 심사

소수자 난민이 난민 지위 인정 심사관에게서 받는 무지와 편견에 찬 질문들
등록 2020-06-27 06:38 수정 2020-06-29 01:31
난민인권네트워크가 6월18일 서울 마포구 ‘인권재단 사람’에서 난민 인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난민인권네트워크 페이스북 갈무리

난민인권네트워크가 6월18일 서울 마포구 ‘인권재단 사람’에서 난민 인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난민인권네트워크 페이스북 갈무리

자신이 살아온 국가에서 종교와 정치적 사상, 또는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박해받는 사람들이 피난처를 구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추구하는 데 반대할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곁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릴 때, 그들은 의심부터 받기 쉽다. 여기서 등장하는 ‘가짜 난민’ 틀은 이들이 과연 순수한 박해를 받아 난민을 신청한 것인지, 혹은 돈벌이를 위해 자신의 서사를 속이는 것은 아닌지 불신하게 한다.

활동가들 육성 담은 보고서 발간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는 난민 가운데 성소수자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이 있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성별 표현 등을 이유로 표적이 되고 생명을 위협당하는 가운데 숨죽여 살다가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다. 그마저 심사숙고 끝에 도피처를 선택하기보다 긴급한 상황에서 이동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 가입국이자 난민법 시행국으로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과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수년 전 성소수자와 HIV 감염인 난민이 성소수자 인권단체에 긴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지원과 대응을 모색하며 성소수자 인권활동가와 난민 인권활동가, HIV/AIDS(후천성면역결핍증) 인권활동가가 모여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를 발족했다. 이후 네트워크는 상담과 생활지원뿐 아니라 재판과 심사에 조력하며 성소수자 난민 심사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2019년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성소수자 난민 지원 경험이 있는 변호사 7명과 활동가 1명을 인터뷰해, 대한민국에서 이뤄지는 성소수자 난민지위 인정 심사의 문제점을 조사하고 분석했다. 6월20일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무지개는 국경을 넘는다-성소수자 난민 심사 과정에서의 인권 보장’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성소수자 난민이 심사받는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분석한다. 그 하나가 심사관 문제다. 많은 심사 과정에서 성소수자 난민은 성소수자임(동시에 난민임)을 입증하라고 과도하게 요구받는다. ‘언제 성소수자가 되었습니까?’ ‘성소수자가 되는 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까?’ 등 심사와 아무 관계도 없거니와 민망할 정도로 무지와 편견에 기반한 질문이 빈번하게 나온다.

그러나 누구도 정형화된 정체성 범주와 정체화 각본에 들어맞는 서사를 오류 없이 완벽하게 진술할 수 없고 그렇게 살 수도 없다. 더욱이 성소수자 난민은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속일 수 있다. 이 경우 심사관은 당사자가 숨겨야 했던 맥락을 무시한 채 그가 거짓말한다는 의심부터 하기 십상이다. 반대로 박해 사실을 말하면 심사관은 숨기고 살면 되지 않느냐는 논리로 그의 입을 막아버린다. 성소수자 난민을 지원했던 한 변호사는 “출신국에서 성소수자에게 사형선고를 하는 국가 정황이 있는 사례였음에도 ‘증거가 없으니 신청자 진술에 신뢰가 안 간다’ ‘성소수자로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나 표현을 안 했으니 위험하지 않다’는 이유로 난민 불인정을 했다”고 밝혔다.

‘성관계 얼마나 해봤냐’ 묻기도

표준 가이드라인 없이 심사관의 자의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자의적 기준은 난민과 성소수자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편견·혐오 정서를 반영하기 쉽다. 성소수자 인권을 제도로 보장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난민 심사 과정에서 성소수자와 성적 문란함을 등치시켜 난민에게 불필요하고 모욕적인 질문을 던지는 상황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성소수자 난민은 심사 과정에서 ‘성관계를 얼마나 해봤냐, 자주 해봤냐’ ‘성관계를 할 때 여러 명과 해본 적 있냐’ ‘자발적으로 첫 동성 성관계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 난민들은 애써 용기 내어 답변하지만, 심사가 끝난 뒤 “당황스럽고 불쾌한 경험”이라고 토로한다. 난민을 지원했던 한 변호사가 말한다. “성소수자 난민 당사자는 심사를 겪으면서 2차 심리적·정신적 피해를 본다.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 아픈 부분을 이야기하는데 흥미 위주의 질문을 받으면 또 다른 트라우마를 겪는 것 아닌가. 난민 심사의 심사관과 판사는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기에 교육이 필요하다.”

적절한 통역인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도 주요 문제로 지적된다. 통역은 심사관과 난민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중요하다. 하지만 난민 통역에 대한 인적자원이 부족한 상황은, 난민 개개인이 갖는 특수한 경험을 전달하기를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더구나 많은 성소수자 난민은 같은 출신국 통역인이 참여하는 것에 어려워한다. 통역인이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견해를 가졌다면 심사에 불리한 통역을 할 수 있고, 통역인을 통해 자신의 상황이 본국에 알려져 자신의 가족과 동료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성소수자 난민의 고충이 고려되는 일은 드물다.

보고서는 한국의 성소수자 난민 심사 과정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성소수자와 난민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가령 낙인에 근거한 범죄 수사 방식의 심사가 아닌, 난민 처지에서 박해 경험의 맥락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난민의 상황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미 여러 국제 규범은 난민이 “박해받을 것이라는 충분히 근거가 있는 두려움”을 가졌는지 입증할 책임을 난민과 심사 주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난민 신청자가 박해 공포를 입증하는 과정에 반드시 “선의의 해석”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명시한다. 증거가 없거나 부족하고 당사자의 기억이 불분명하더라도 진술이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있다면 신빙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낙인’ 아닌 ‘맥락적 이해’를

이는 곧 국제인권규범에 근거한 반차별 심사 지침에 대한 요구로 연결된다. 체계화된 지침을 마련하는 것은 심사 과정에서 성소수자와 HIV 감염인에 대한 편견이 반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침 마련은 성소수자의 정체성과 인권에 대해 올바른 정보와 인권규범에 부합하는 내용을 교육받고, 국내외 성소수자 관련 의제를 이해하고 업데이트할 것까지 포함한다.

현재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는 소수자 난민이 심사 과정에서 겪는 차별과 인권침해를 문제제기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며, 생계비 지원 기금을 마련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한국에 도착한 이들이 부당하게 대우받지 않고 공동체의 존중과 사랑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으려면 사회의 지지와 연대가 절실하다. 난민은 지금-여기를 함께 바꿔나갈 동료 시민이니까.

남웅 행동하는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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