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라 아가야, 잘 자라, 잘 자라.”
헤드폰에서 예멘 난민 칼리(24)가 부른 자장가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온다. 칼리가 낯선 땅에서 모국어로 부른 자장가는 생경하지만 따뜻하다. 관객은 처음 듣는 ‘이방인의 소리’에 귀를 맡긴다.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앉는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좋은 삶’을 주제로 기획된 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전시 작품 권병준의 다. 관객은 헤드폰을 쓰고 작품이 전시된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광장과 정원을 거닌다. 헤드폰에서는 권 작가가 녹음한 자연의 소리와 예멘 난민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권 작가는 “예멘인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자장가와 고향의 노래를 저장하고 싶었다. 다른 기억과 삶의 이야기를 담은 소리가 헤드폰을 통해 미술관 광장에 울리면 빈 공간은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로 채워진다”고 작품을 설명했다.
기자가 권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지난 8월7일 제주도 주민과 예멘 난민 50명이 서로의 얼굴을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제주 컬러풀 워크숍’에서였다(제1225호 ‘다름을 그리고 서로를 알아갑니다’ 참조). 행사가 진행되는 제주 시내 작은 카페 한켠에서 자신이 녹음한 예멘인의 노래를 틀고 있었다. 그는 당시 녹음한 예멘인의 노래로 만든 작품 를 11월 말까지 전시했다.
중동에서도 특별한 예멘의 음악전시를 마치고 새 작품을 준비 중인 권 작가를 12월12일 서울 마포구의 한 전시 공간에서 만났다. 과거 밴드 ‘삐삐롱스타킹’ ‘원더버드’ ‘모조소년’의 뮤지션으로서 한국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던 권 작가는 예멘인의 노래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처음 예멘인의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다. 다들 음악성이 엄청났다. 한국 전통음악을 공부하는 바레인 친구에게 들어서 나중에 알게 됐는데, 예멘은 아랍권에서도 음악성이 뛰어난 나라로 손꼽힌다”며 예멘인의 음악성에 대한 찬사로 운을 뗐다.
그는 예멘인의 노래가 우리 전통음악 ‘판소리’와 닮은 부분이 많다고 했다. “멜로디를 미세하게 변화시키는 창법과 굉장히 거칠고 격한 면모가 대조를 이루는 창법이 인상적이었다. 라디오에서 세계 음악을 다루는 방송을 진행한 적이 있어 중동 음악은 익숙하지만 예멘 사람들 노래는 더욱 특별했다.”
그가 예멘인들 노래에서 판소리를 들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랍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언어 체계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에 있는 예멘인들도 일상에서 오래된 시구를 인용하고, 시 짓기를 즐긴다. 아주 오래된 신화가 노래 가사에 담긴 것도 많다. 세속적인 가사와 서구화된 대중음악이 주류인 우리와 다른 부분이다.
“제주도 할머니들이 예멘 난민들을 아들 삼겠다고 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 피해서 온 사람들은 일본 순사라도 숨겨주는 거라고, 내쫓고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권 작가는 따뜻했던 할머니들 이야기를 떠올리며 난민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각박해진 이유를 많이 생각한다. 돈 때문은 아닌 거 같은데, 따뜻했던 전통은 회복해야 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방인 아닌 사람 누구인가권 작가는 예멘이라는 낯선 땅에서 온 이방인들에게서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을 떠올렸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게 썩었다. 종교도 썩었고 전통은 없어졌다. 사람들이 그것을 회복할 계기가 없었다. 그런데 이들(예멘인)이 일깨워줄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배울 게 많다.”
“예멘 난민 문제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슈라고 생각했다. 이 주제를 빨리 다뤄야겠다고 판단한 이유다.” 권 작가는 지난 6월, 제주에 당도한 예멘인들의 이야기가 언론에 나오고 이들이 한국에 정착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듣고 제주행을 결심했다.
왜 난민과 이방인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대인은 다 이방인이다. 지금 도시에 사는 사람 중 고향이 남은 사람이 누가 있나. 태어난 집이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의 고향은 사라졌고, 마음 둘 곳도 없다. 현대사회에선 어디에 있든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예멘인과 이방인을 혐오할 수는 없다.” 권 작가의 말은 명쾌했다.
권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 대접 받았던 것과 네덜란드에서 지냈던 7년의 시간도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도 했다. 그는 2004년까지 활발한 음악 활동을 했지만 한국 사회는 그의 실험적인 음악과 자유분방함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는 2005년 갑자기 활동을 중단하고 네덜란드행을 택했다. 네덜란드 왕립음악원에서 소리학과 예술공학을 전공했고, 암스테르담의 전자악기 연구기관인 스타임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다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와 미디어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권 작가가 준비하는 작품은 다. 작품을 위해 로봇 12개를 만든다. 이 로봇들은 춤을 추고 자기들끼리 놀이를 하다가 관객에게 손 내밀기도 한다. “이 낯선 로봇이 내미는 손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지 지켜볼 것이다. 난민 문제에서 역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 2세의 자장가 담겠다”권 작가가 이방인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들으며 ‘내가 누군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내년에도 계속된다. 이번에는 이주노동자 2세다. “충남 홍성을 비롯한 농촌 마을에서 자란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노래를 담을 계획이다. 이주노동자 어머니와 아들의 자장가를 위주로 녹음하려 한다. 이주노동자 2세들은 이야기해보면 굉장히 상처가 많다. 이 부분을 계속 들여다보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과 관계를 맺고 알아볼 거다.”
한때 뮤지션이었던 그에게 음반 작업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음악을 하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드러내는 또 다른 형식일 뿐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드러내는 게 더 음악에 가까운 일로 느껴진다.” 우문현답이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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