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사람이다. 자기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건 동물이다.”
카슈미르 독립운동가 사르다르(가명)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가에 팬 주름이 깊고 낯빛이 어두웠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사르다르는 2016년 10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을 수시로 들른다. 다른 난민과 이주노동자들을 돕기 위해서다. 그는 외국인을 돕는 법률사무소에서 사무보조로 일하고 있다.
“영어를 못하는 난민을 돕기 위해 외국인청에 갔다. 난민이 사무실 의자에 앉자 공무원이 ‘왜 여기 앉느냐’며 윽박질렀다. 난민이라 무시한다고 판단한 나는 ‘이 의자는 왜 여기에 둔 거냐’며 맞섰다. 내가 난민과 이주노동자를 돕기 위해 계속 외국인청에 가니까 공무원이 ‘다시는 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이기 때문이다.”
난민이 사람대접 받도록인도와 파키스탄, 중국 사이에 위치한 사르다르의 고향 카슈미르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땅이다. 수십만의 인도군과 파키스탄 군대가 주둔해 ‘서남아시아의 화약고’라고도 한다. 1800년대부터 대다수 주민이 이슬람교를 믿었지만 힌두교 정권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영국이 1947년 인도를 떠나면서 인도반도가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로 분리독립했고, 유엔은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카슈미르는 자기결정권을 가진다”고 결의했다. 하지만 힌두교도인 카슈미르의 지도자가 일방적으로 인도 편입을 결정했다. 카슈미르 내 이슬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켜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유엔은 1949년 휴전을 선언하고 카슈미르 지역을 아자드카슈미르와 잠무카슈미르로 나눠 각각 파키스탄과 인도가 분할점령하도록 했다.
카슈미르의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사르다르는 2001년 일찌감치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카슈미르에는 대통령·총리·의회가 있지만 모두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 아래 있었다.
사르다르는 2007년 카슈미르의 야당인 잠무카슈미르 아와미 국민당(JKNAP)에 가입해, 2008년 12월 푼치 지역 당대표로 선출됐다. 2013년까지 독립운동과 관련된 시위에 참여했고, 파키스탄 군정보국(ISI)이 저지른 독립운동가와 당 간부들의 납치·암살에 항의하는 평화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2009년 6월 파키스탄 군정보국에 납치돼 사흘간 감금되는 등 수차례 체포됐다. 군정보국 관계자들은 사르다르를 폭행·고문하며 독립운동을 그만두라고 협박했다.
파키스탄 군정보국의 표적파키스탄 군정보국이 사르다르 가족에게도 위협을 하자, 사르다르는 2012년 부모와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사르다르의 부모와 형제자매는 모두 의사였고, 그의 집안은 지역사회에서 명문가로 통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지 않냐고 부모님께 물었다. 부모님은 ‘옳지만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싸운 것처럼 계속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이후 단 한 번도 가족과 연락하지 않았다.”
파키스탄 군정보국이 2013년 5월 카슈미르 독립운동 연합전선의 대표를 암살하면서 사르다르도 위기를 맞았다. 사르다르는 수차례 항의시위에 참여하고, 카슈미르의 독립을 외치다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파키스탄 정부는 반정부 활동 혐의 등으로 사르다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정당 관계자들은 그에게 카슈미르를 떠날 것을 권유했다. 많은 동지가 체포돼 숨져 돌아오는 것을 본 사르다르는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기로 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 가방을 꾸릴 시간도 없었다. 베갯잇에 중요한 서류 등만 싸서 길을 떠났다.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파키스탄 군인이 곳곳에 있어 주로 밤에 움직였다. 일주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기도 했다. 계곡물로 배를 채웠다. 사르다르는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했지만 이곳에선 언제 군인들에게 붙잡혀 파키스탄에 넘겨질지 몰랐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위조여권을 구했고, 타이와 한국을 거쳐 뉴질랜드로 갈 계획을 세웠다. 뉴질랜드에는 사르다르의 난민 신청을 도와줄 변호사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향하기 직전에 발목이 잡혔다. 위조여권을 쓴 것이 발각돼 인천공항에서 체포된 것이다. 2014년 1월의 일이었다. 사르다르는 “한국에 머물 계획이 없다. 뉴질랜드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한국 정부는 그를 경기도 화성에 있는 외국인보호소로 보냈다. 사르다르는 보호소에서 난민신청서를 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말이 좋아 보호소지 감옥보다 못했다. 운동도 할 수 없었고, 뉴스를 보거나 인터넷을 할 수도 없었다. 난민 신청을 하고 면접을 준비하려면 고국의 지인들과 연락하고 자료를 받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절망한 사르다르는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그사이 난민소송에 미숙했던 소송대리인이 주한 파키스탄대사관에 내용증명을 요청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사르다르는 대사관 쪽으로부터 “파키스탄에 데려가 처벌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난민인권센터의 도움을 받아 보호소를 나올 수 있었지만 1년7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단식 끝에 보호소를 나왔지만 눈도 잘 떠지지 않았고, 제대로 걷기도 어려웠다. 마치 좀비와 같았다.”
합법적 존재, 그 너머사르다르는 카슈미르에 있는 친구들과 한국 인권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모았고, 다시 난민소송에 임했다. 사르다르는 2016년 10월 법적으로 난민이 됐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은 전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신분증이 나오고 2019년까지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됐지만 그뿐이다.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무런 계획을 세울 수 없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웃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지만, 한국에서 나는 여전히 고립돼 있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난민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되레 내 지위가 위협받는다. 보호소를 나왔어도 여전히 손이 묶인 기분이 드는 이유다. 나는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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