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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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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조 운퉁의 슬픈 바다

평화의 섬 역행한 국제관함식
등록 2018-10-13 18:45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는 당시 열일곱 살에 체포, 심문, 구금됐다. 재판도 없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형무소와 노동교화소에서 9년 동안 수감생활. 생존을 위해 들쥐, 달팽이, 꾸물거리는 것들까지 잡아먹어야 했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도 14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들은 비위생적인 수용소에서 노예처럼 일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가 저지른, 50만~300만 명이 희생된 대학살 시기였다. 그는 감옥에서 사전 한 권으로 영어를 습득했으며, 상상력으로 종이 위에 건반을 그려 피아노를 배웠다. 출소 뒤 피아노 방문 교사가 업이 되었다. 그에겐 오랫동안 자유가 없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군부의 학살과 강진의 희생자</font></font>

“무엇보다 이 자리에서 자유롭게 제 감정을 말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지난해 한국의 ‘진실의 힘’ 수상자이기도 한 인도네시아 제노사이드(인종·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 집단 구성원을 대학살해 절멸하는 행위)의 희생자이자 생존자인 YPKP65(인도네시아 대학살 희생자 조사를 위한 재단) 대표 베드조 운퉁(70). 그가 얼마 전 ‘제주4·3, 진실과 정의’를 주제로 제주4·3기념사업위가 주최하고 제주4·3연구소가 주관한 국제 콘퍼런스에 참가했다.

그는 지금도 군부 종식이 되지 않은 상황을 사는 인도네시아의 고통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떠올렸다. 파묻힌 과거사의 진실이 드러나고 그것을 기억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하나 자기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젊은 세대는 잘 모른다.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일, 그들이 할 일이라고 했다.

태풍 콩레이의 전조로 바람과 함께 제주에 온 그는 시종 활달했으나 무거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제주로 향하던 날에도 인도네시아는 신음하고 있었다. 강진과 쓰나미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고 폐허가 된 술라웨시섬 팔루 역시 65년 대학살 때 수천 명이 죽어간 곳이라 했다. “지금 상황은 65년 상황보다 힘듭니다. 당시는 희생자들이 사람에게 당했지만, 지금은 자연에 당한 것이어서 손쓸 수 없는 느낌이지요. 다른 점은 65년엔 희생자에게 도움을 주려면 그 사람도 억압받았는데, 지금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늘 새벽이면 운동을 하며 강하게 살아남아야 했다는 이 노(老)인권운동가. 그는 이 시대, 한국의 통일 노력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했다. 뼈아픈 잔재를 딛고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한반도기를 들고 남북단일팀으로 임하는 모습에서, 자국의 의지로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모습이 그랬다. 해서 인도네시아 정부에 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촉구할 수 있도록 연대해주기를 바랐다. 냉전 시기에 희생된 제주4·3 참극과 인도네시아 참극이 있고, 거기에 미국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도 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정의는 바로 서야 하고. 화해는 그다음입니다.”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 과거사로 상처를 입은 땅의 사람들이 진실과 정의를 놓고 뜨겁게 공유하고 공감하는 시간, 평화를 위해 연대하는 시간이었다. 정부가 과거사 극복 문제에 너무 시간을 쓰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하나, 과거사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역사이며 맞이해야 할 미래의 거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역사가 있어 아름다운 바다</font></font>

한바탕 태풍이 지난 제주바다는 서럽도록 아름답다. 그리고 아직도 해군기지로 치유되지 않은 상처 속 강정바다에서는 화려한 국제관함식이 열렸다. 평화의 섬에 역행한다며 이를 반대하는 나라 안팎 목소리들 역시 솟구쳤다. 정부는 어떻게 이 목소리들을 껴안고, 풀어내고, 치유할 것인가. 4·3으로 주저앉은 황폐한 땅을 끝내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낸 섬. 멸절된 기억을 안고 죽은 이들을 대신해 홀로 된 어머니와 생존자들이 일으켜세운 땅. 아픈 과거사를 품은 바다 앞에서 한 참가자가 남긴 말이 맴돈다. “바다는 역사가 있어 아름답습니다.”

허영선 시인·제주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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