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을 배척하면서 증오 감정을 드러내는 일본 극우 단체. 연합뉴스
5월3일은 일본 헌법기념일이다. 전쟁 포기를 선언한 현행 헌법을 지켜낼 것인가, 아니면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해 개헌할 것인가. 곳곳에서 ‘호헌파’와 ‘개헌파’의 주장이 부닥치고 있다.
그러나 언론사에서 일하는 우리에게 이날은 또 다른 각별한 의미가 있다. 31년 전 기자가 살해당한 날이기도 하다. ‘세키호타이(赤報隊·적보대) 사건’. 우리는 해마다 이를 악물며 이날을 맞는다. 1987년 5월3일 밤 한신지국(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산탄총을 가진 남자가 침입했다. 복면 쓴 남자는 사무실에 있던 기자에게 총을 쏜 뒤 한마디도 하지 않고 떠났다.
지근거리에서 총을 맞은 기자(당시 29살)는 병원에 도착한 뒤 숨을 거뒀다. 또 다른 기자는 온몸에 80알 넘는 산탄 총알을 맞고 새끼손가락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지만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다. 그 뒤 세키호타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힌 범인이 성명문을 에 보냈다. “지금까지 반일 세대를 길러온 언론에 엄벌을 내려야 한다.” “모든 아사히 사원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아사히의 논조를 ‘반일’이라 생각하는 우익세력의 범행이 틀림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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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세키호타이는 약 3년 동안 총 8건의 총격·협박 사건을 일으켰다. 경찰은 수천 명을 동원해 수사했고, 피해 당사자인 도 특별취재반을 꾸려 따로 조사를 이어갔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채 2003년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난 1990년 한 주간지 기자가 됐다. 정계·재계·예능계 스캔들을 주요 기사로 싣는 잡지였다. 그렇지만 내가 기자임을 깨닫는 순간마다, 언제나 머릿속엔 세키호타이 사건이 떠올랐다. 테러리즘으로 언론을 위축시키려는 이들에 대한 분노를 잊은 적이 없었다.
사건 뒤 31년이 지난 5월3일. 한신지국 앞과 도쿄 긴자 2곳에서 세키호타이를 지지하는 거리행진이 벌어졌다. 참가자는 평소 외국인 배척 등을 주장하는 극우단체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히노마루(일본 국기)를 휘두르며 ‘세키호타이 지지’를 호소했다. “반일 세력을 추방하자”고 외쳤다. 역겨웠다. 이런 풍경을 만들고 만 일본 사회가 한심했다.
31년 전 ‘반일’이라는 말은 흔하진 않았다. 지금은 반일이 책, 신문, 방송, 학교 등 여기저기서 쓰인다. 지난해 일왕이 고마신사(고구려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온 후손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신사)를 방문했을 때, 일왕을 반일이라 비난하는 글이 인터넷에 넘쳐났다. 30년 전 테러리스트들이 썼던 표현이 이젠 예사로 쓰이는 ‘매도어’(혐오 표현)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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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일본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시대는 세키호타이가 바라던 대로 흘러온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전쟁에 대한 반성은 희박해졌고, ‘역사 수정주의’는 박차를 가하고 있다. 편협한 민족주의가 퍼져 이젠 세키호타이의 테러를 찬미하는 이들이 당당히 거리를 행진하는 시대가 됐다.
산탄총에 쓰러진 기자의 원통함을 생각한다. 우린 세키호타이를 추적하는 데 실패했고, 세키호타이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러니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다. “노 파사란!”(저놈들을 통과시키지 마!) 거대한 힘에 휩쓸려 날아갈 것 같을 때, 나는 스페인 내전 때 반파시스트 진영의 슬로건이었던 이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나는 권력의 악을 폭로하며 최전선에서 싸우는 멋진 기자는 아니다. 그러나 태평하게 시대에 휩쓸리며 총에 맞아 죽은 기자를 잊어버리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 “저놈들을 통과시키지 마!” 작은 목소리지만, 언제나 두려워하지만, 그래도 계속 호소하고 싶다. 이웃 한반도엔 남북 정상이 만나는 시대가 왔다. 시대는 움직인다.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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