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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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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하바라에서 느낀 ‘전쟁 전야’

일본 중의원 선거, 북풍과 야당 분열로 아베 총리 이끄는 자민당 압승…

일본 국기와 애국심 앞세운 선거 전략 먹혀들어 무력 사용 금지한 ‘헌법 9조’ 개정 코앞
등록 2017-10-31 17:02 수정 2020-05-03 04:28
10월21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오타쿠들의 성지’인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이튿날 열리는 중의원 선거를 위한 마지막 유세에 참여하고 있다. 아키하바라는 어느새 우익의 성지로 변했다. EPA 연합뉴스

10월21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오타쿠들의 성지’인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이튿날 열리는 중의원 선거를 위한 마지막 유세에 참여하고 있다. 아키하바라는 어느새 우익의 성지로 변했다. EPA 연합뉴스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는 ‘애니메이션의 성지’라고 알려져 있다. 애니메이션 관련 가게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지방과 해외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한다. 최근엔 인기 아이돌 그룹 ‘AKB48’이 출연하는 라이브하우스 ‘AKB48극장’으로 유명해졌다. 애니메이션, 아이돌, 컴퓨터게임. 아키하바라는 일본 ‘서브 컬처’(하위문화)의 최첨단을 달리는 곳이다.

‘히노마루’ 든 2천 인파

이 거리는 때때로 (헤이트 스피치 집회가 열리는 등) 내셔널리즘(국가주의)이 분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본 중의원 선거가 열릴 때마다 자민당은 선거전의 마지막날에 열리는 ‘최후 연설’을 여기서 한다. 예전에는 도쿄의 시부야·신주쿠·이케부쿠로 등 큰 역과 버스터미널이 있는 곳에서 했지만, 최근 몇 해 동안은 어김없이 아키하바라가 최후 연설 장소였다.

자민당 공보담당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키하바라에선 청중의 반응이 좋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잘 모인다. 선거전의 ‘마지막 당부’ 연설 장소로 이제 아키하바라 외의 공간은 생각할 수 없게 됐다.”

10월22일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이 선거운동의 피날레 장소로 정한 곳도 당연히 아키하바라였다.

중의원 선거 투표일을 하루 앞둔 10월21일 아키하바라 역 앞 광장은 2천여 인파로 가득 찼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히노마루’(일본 국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인파의 가장 앞 줄에 “힘내라, 아베 총리”라고 쓰인 커다란 펼침막도 걸려 있었다. 이날의 ‘주연’이 도착하기 전부터 역 앞 광장은 열기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민당의 승리를 위해 힘내자!”

“아베 정권을 지지한다!”

이런 구호가 곳곳에서 쏟아져나왔다.

그러는 한편, 아베 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사의 카메라기자에겐 “꺼져라!” “창피한 줄 알라!” “편향 보도를 그만둬라”와 같은 소리를 퍼부었다.

저녁 7시, 어두움이 하늘을 덮어갈 무렵 용맹스러운 음악 소리에 맞춰 아베 신조 총리가 도착했다.

“아베상!”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인파 속에서 일본 국기가 물결쳤다. 선전차량(일본은 선거 유세를 할 때 따로 무대를 세우지 않고 차량 위에 올라 연사가 연설한다) 위에서 아베 총리가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북한의 위협에 굴해선 안 된다. 일본인의 생명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자민당에) 힘을 실어주셨으면 한다!”

“일본을 지켜내고, 일본의 미래를 열어젖힐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자유민주당(자민당)밖에 없다!”

내셔널리즘의 열광

발언이 끝날 때마다 청중은 “옳소!”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와 함께 히노마루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이것은 말 그대로 ‘전쟁 전야’가 아닌가. 어쩐지 섬뜩했다. (자민당의 마지막 유세 모습은) 어떻게 보더라도 극우집회 같은 모습이었다. 내셔널리즘의 열광, 정권에 대한 충성과 맹신, 지금이 정말로 21세기인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유세장엔 소수파였지만, 아베 총리에 반대하는 야당 지지자들이 섞여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반아베파’가 적었던 것은 많은 이들이 야당 후보의 응원 집회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10여 명의 야당 지지자들은 “헌법을 지켜라”고 쓴 종이를 손에 들고, 때때로 “아베는 그만둬라”며 야유를 날렸다.

그때마다 아베 지지자들의 욕설이 날아왔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

“선거 방해를 하지 마라!”

“너희는 북조선 편인가?”

히노마루를 내건 무리가 이들을 둘러싼 뒤 완력으로 유세장에서 몰아내려고도 했다. 이런 장면이야말로 현재 일본 사회에 확실히 뿌리내린 상징적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차별과 배타의 공기, 진저리가 날 정도의 ‘애국심’이 일본을 잠식하고 있다. (이런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이번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의석 3분의 2 확보해 개헌 가능

이번 총선거에서 ‘아베 1당’ 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제48대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을 합친 연립여당은 313석을 차지해 중의원 전체 의석(465석)의 3분의 2(310석) 이상을 얻었다. 헌법개정안 발의에 필요한 의석(중의원과 참의원 각각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이 필요함)을 확보한 것이다.

그렇다. 이번 선거로 개헌이 가능해졌다. 아베 총리는 북한의 ‘위협’을 핑계로, 일본이 앞으로 무력 사용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헌법 제9조의 개정을 노리고 있다. 또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수의 힘’을 이번 선거에서 확보했다. 비록 명목상이지만, 일본이 전후 오랫동안 (국제사회를 상대로) 내걸어온 ‘평화주의’ 간판을 이제 떼어낼 일이 눈앞에 있다.

애초 이번 선거는 파란이 속출하는 복잡한 양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베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9월 말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해선 선언이었기에 자민당에서도 반대 의견이 잇따랐다. 자민당의 한 유력 정치인은 “왜 해산을 해야 하는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며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사실 아베 총리는 (이번 선거에서) 의석을 어느 정도 잃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한 일간지 정치부 기자에 따르면 “해산 발표 단계에서 한 사전 조사에서 자민당이 최소 50석 이상 잃을 것이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북한 핵에 묻힌 아베의 비리 의혹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압승을 거두었던 지난 7월 도쿄도의회 선거의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다. AP 연합뉴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압승을 거두었던 지난 7월 도쿄도의회 선거의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다. AP 연합뉴스

그런데도 해산을 결행한 것은, 총리 자신을 괴롭히던 ‘모리토모·가케학원 의혹’(아베 총리가 자신과 친한 인물에게 학교 신설을 위한 편의를 제공했다는 의혹)에 쏠린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 문제 때문에 아베 내각의 지지도가 하강선을 그리고 있었다. 각 신문사의 여론조사에서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30% 안팎을 오갔다. 이대로라면 정권이 ‘레임덕’(권력 누수)에 빠질 수도 있었다. 이 무렵, 생각지도 못한 원군이 등장했다. 북한이었다.

미사일 발사와 핵 개발과 관련된 뉴스가 흘러나올 때마다 아베 총리는 ‘국가의 위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렇게 (북풍이 불게) 되면 (아베 총리의) ‘의혹을 추궁하는’ 목소리가 지워지고 만다. 국내 문제로 고통받는 아베 내각이 원할 때마다 미사일을 발사해주는 북한은 틀림없이 구조선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를 선거에 적극 이용했다. ‘북한의 위협’을 선동하며, 무력 사용을 위한 헌법 개정을 전면에 내건 뒤, 한발 더 나아가 앞뒤가 안 맞긴 하지만 교육이나 복지의 확충 등의 공약을 뒤섞어 “국난에 대처해야 한다”는 ‘모 아니면 도’와 같은 선거에 나선 것이다.

물론 이것이 무모한 도전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50석이나 되는 의석을 잃을 각오를 하고 선거전에 나선 것이다. (아베 총리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자신과 자민당을 지키는 것이었다. 앞서 나온 정치부 기자는 “어쨌든 모리토모·가케학원 문제를 유야무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는 생각이었다. 의석을 좀 잃더라도, 총선거를 하면 헌법 개정 같은 것이 두드러지게 된다. 정권 안정을 위해선 (총선거를 통해 정계를) 한번 리셋할 필요가 있었다”고 아베 총리의 의도를 분석했다.

이후 북한 이상으로 강력한 원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지리멸렬한 야당이었다. 아베 총리가 해산의 뜻을 밝힌 그날,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갑자기 ‘희망의당’을 창당하겠다며 깃발을 내걸었다. 올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약진한 고이케 지사가 자신이 이끌던 ‘도민 퍼스트의 모임’을 발전시켜 총선거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급조한 희망의당 당수가 된 고이케 지사는 ‘새로운 보수정당’을 만들겠다고 호소하며 아베 자민당에 반기를 들려 했다. 고이케 지사 편에선 지난 도의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성공 체험’이 있었기에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붐을 일으킬 것이라 믿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제1야당이던 민진당과 합당 이야기가 나오면서 형세가 불리하게 돌아갔다. 마에하라 세이지 민진당 당수는 (애초 민진당으로 출마하려던) 입후보자 전원이 희망의당으로 옮겨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반발하는 이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민진당은 애초 우파에서 좌파까지 다양한 색깔을 띤 이들이 모인 오월동주 같은 정당이었다. 애초 보수와 가깝던 우파계 의원들은 이기는 쪽으로 붙으라며 희망의당으로 당적을 옮겨 탔다. 그러나 좌파계 의원들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반아베’라는 간판을 내건다 해도 헌법 개정을 지지하는 희망의당은 자민당의 2중대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당으로 당적을 옮긴다는 것은 자신의 신념을 내던지는 것을 의미했다.

소선거구제와 ‘지역 기반’ 우위 자민당
에다노 유키오 대표가 이끄는 입헌민주당은 10월22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약진했지만, 아베 총리의 독주를 막진 못했다. 한겨레

에다노 유키오 대표가 이끄는 입헌민주당은 10월22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약진했지만, 아베 총리의 독주를 막진 못했다. 한겨레

게다가 고이케 지사가 “희망의당의 정책과 맞지 않는 이들의 입당을 인정하지 않는다. 배제하겠다”고 말한 것이 파문을 일으켰다. 그런 (고이케 지사의) 냉담한 발언이 텔레비전으로 몇 번이나 방송되면서, 고이케 지사에 대한 평가가 급락했다.

결국 ‘배제’ 대상으로 여겨지던 민진당의 자유주의계 의원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희망의당으로 이적을 거부했다. 이들은 새로 ‘입헌민주당’이라는 정당의 깃발을 내걸거나,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결국 야당은 분열하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자민당의 승리가 점쳐지기 시작했다. ‘반아베’ ‘반자민당’ 표가 분산되면 여당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처럼) 일본도 소선거구제다. 이 제도 아래서는 선거구별로 최고 득표자 한 명만 당선된다. 예를 들어 자민당 후보를 지지하는 표가 줄어들더라도, 대립하는 복수 후보가 출마해 표가 나뉘면 ‘지역 기반’이 강한 자민당이 압도적으로 강력함을 발휘한다.

이번 선거에선 이런 ‘공멸’을 막으려고 곳곳에서 공산당과 입헌민주당이 연대해 후보단일화를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희망의당이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자를 내세운 탓에 어찌됐든 ‘반자민당’의 표가 흩어지고 말았다. 결국 자민당이 단독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고,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합쳐 전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얻었다. 우리 편의 실책으로 자민당에 승리를 갖다 바친 꼴이 됐다.

그러나 자민당이 이긴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아키하바라의 풍경이 내 뇌리 속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선거운동을 취재해왔지만, 이 정도로 내셔널리즘을 드러낸 유세 현장을 본 적이 없다. 일본은 확실히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금 내 작업실 책상 위엔 작은 히노마루가 놓여 있다. 아키하바라에서 자민당의 최후 연설을 취재하던 중, 자민당 관계자에게 받은 것이다. 플라스틱 깃대에 얄팍한 종이가 붙어 있는 싸구려 국기였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이런 히노마루 무리와 마주하며 살아왔다. 나는 국경일이나 국가 행사가 있을 때 국기를 손에 쥐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국기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존중한다. 하지만 히노마루는 현재 차별과 배제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 아키하바라 역 앞에서 사람들이 흔든 히노마루는 아베 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 ‘반아베’에 대한 증오의 표출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반발을 드러내거나 일본에 사는 외국인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히노마루는 그런 뜻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히노마루의 무리가 있다.

이런 광경에 대해선 진지한 우익들 사이에서도 “히노마루가 불쌍하다”는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다. 한 우익 관계자는 “히노마루를 단순한 도구로 쓰는 것에 분노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공포를 느낀다

영국의 문학자 새뮤얼 존슨은 “애국심은 형편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다”는 말을 남겼다. 이번 선거에서 히노마루는 ‘북조선의 위협’ ‘국난을 돌파하자’는 아베 총리의 소리에 호응했다. 그 점에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일본인 모두가 ‘형편없는 이들’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러나 현재 일본 사회의 일부에는 틀림없이 플라스틱과 종이로 만든 히노마루처럼 값싼 애국심으로 흥분하려는 분위기가 있다. 이번 선거 결과에 그런 사회 분위기가 드러난 것은 아닐까.

야스다 일본 독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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