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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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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암시민 살아진다

등록 2017-12-16 12:03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제주 어르신들이 많이 쓰는 말에 ‘살암시민 살아진다’가 있다. 살다보면 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것과 더불어 많이 쓰는 말이 ‘사난 살앗주’(사니까 살았다)다. 어떤 순간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 한 생의 축약이다. 스스로 한 생을 끌어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에도 이와 닮은 속담이 있던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졸지에 남편 잃고 자식 잃고 사흘낮 사흘밤을 망연자실했단다. 그래도 자식을 키워야 했기에 바다로 나갔다는 제주 해녀 할머니에게도 삶은 ‘살암시난 살아진다’였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용기와 위안의 언어다

다시 타오른 촛불

살다보면 누군들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던 계절이 없을까. 베갯모가 눈물로 뒤범벅됐으나 그 고통을 말하기 싫다는 어르신, “시국이 그런 때였으니까”란 한마디로 모든 세월을 끌어안는 사람들, 한때는 그렇게 북받치는 어깨를 겨우 억누르기도 하였으리. 그러기에 이 말은 모든 삶의 고개를 타넘은 사람들이 그 고개를 넘으면서 건져올린 철학이다. 돌아보니 그랬다. 당장은 죽을 것 같은 오늘도 살다보니 살 수 있었다

한 해의 끝을 향해가던 이 계절, 우리들의 광장엔 또다시 촛불이 일렁였다. 촛불혁명의 기적을 가져왔던 제주시청, 서귀포 광장에선 또다시 추모의 촛불이 차디찬 하늘을 갈랐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도 그 애도와 분노의 목소리가 눈물범벅처럼 뒤엉켰다. 광장 한쪽엔 노란 리본, 기원과 현실에 대한 질타가 들어간 포스트잇이 가득가득 붙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던 그 자리, 현장실습에서 죽어간 서귀포의 고교생 이민호군을 위한 촛불이었다. 그 광장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소년을 떠올리면서 함께한 어른도 아이도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건 타살과 다름없었기에.

지난 12월6일 모교에서 열린 이 열여덟 소년의 영결식장에서 친구는 작별 인사를 했다. 깊은 슬픔을 참아내며 읽었다. “너는 저 자리에 있고, 나는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부모의 통곡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미안해, 미안해”와 현장과 어른들을 향한 원망이 쏟아졌다. 건축 현장 막노동을 나가는 60대 가장이 뉴스를 보며 한마디 했다. “내 자식 일 같다”고.

현장에서 제일 눈치 보는 아이들이 실습생이라 했다. 차 한잔 마시며 잠깐 쉬라 해도 그럴 수 없어 한다는 것이다. 일의 강도 역시 어른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단다. 학생은 학교와 현장의 눈초리를 다 봐야 한다. 시간을 초과해도, 불평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거다. 그런 아이들의 현장에 자신의 아이도 나간다고 씁쓸해했다.

다시 저무는 한 해

한 해가 간다. 이 피워내지 못한 영혼이 큰 울림을 내고 있다. 그동안 사각지대였던 현장실습장 구석구석에 불을 밝힌다. 하지만 여전히 억울한 현실의 사각지대를 다 꿸 수는 없다. 일을 시키는 자가 노동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보지 않고는 더 나아갈 수 없다고.

한 해가 간다. 그렇게 버티고, 견디고, 격려하며 함께 촛불광장을 승리로 이끌었던 시간이 간다. 하여 이 땅의 정권 교체를 가져온 참으로 높은 한 해가 간다. 그리고 함께 간다. 세월을 뛰어넘어야 할 세월호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가족사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사람들, 목숨 같은 사랑을 떠나보내고 숯이 된 가슴들, 슬픈 눈동자로 가득했던 저 멀리 난민 아이들의 한 해도 간다.

그래도 이 말이 누군가에겐 조금은 위로가 될까. 이 한 해의 모퉁이에서 스스로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밀물처럼 다가갈 것 같은 말이다. 파도 없는 하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지속돼야 할 삶에 대한 경건함이 밴 할머니의 제주적인 말씀, “살다보민(살당보민) 살아진다”.

허영선 시인·제주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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