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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노오력’ 판타지

최순실 딸의 입학 특혜 의혹
등록 2016-10-25 23:04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여기 두 개의 글과 하나의 말이 있다. 하나의 글은 대통령 최측근의 딸이 썼다. 최측근의 딸은 자격이 없는데도 이화여대에 입학하고, 출석 없이 학점을 이수했다. 대학은 특혜를 주기 위해 학칙을 고쳤다. 부족한 공부를 지적한 지도교수는 연구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대통령 최측근에게 “교수 같지도 않고 이런 뭐 같은 게 다 있냐”는 폭언을 듣고 직을 박탈당했다.

대기업에서 수백억원을 받아 만든 두 재단 가운데 하나는 최측근의 딸이 올림픽 승마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동원됐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 최측근의 딸이 2년 전 남긴 글이다.

또 다른 글은 이화여대생이 썼다. 최측근의 딸에게 쓰는 편지다. 편지는 “어제도 밤을 꼬박 새워 과제를 했다”며 “아마 너는 모르겠지만, 이화에는 이런 내가, 우리가 수두룩해. 그리고 다들 정말 열심히 해서 이곳에 들어왔지”라고 썼다. “누군가는 네가 부모를 잘 만났다고 하더라. 그런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정당한 노력을 비웃는 편법과 그에 익숙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얻어진 무능, 그게 어떻게 좋고 부러운 건지 나는 모르겠다”고도 했다. “네 덕분에 그동안의 내 노력들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그 노력이 모이고 쌓인 지금의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실감이 난다”고도 썼다.

하지만 최측근의 딸이 받은 특혜를 두고 한국 사회가 받은 충격은 이화여대생의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하나의 말은 새누리당 의원의 것이다. “입시나 학사관리 비리와 부정 문제는 평범한 한국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은 존엄 같은 것이다. 학교나 입시는 내가 아무리 가난하고 힘이 없어도, 버티고 노력해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기대 가치가 남아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순실 모녀가 그 존엄을 짓밟았다.”

이 말처럼, 대통령의 권력에 눌린 대기업들이 수백억원을 꺼내 두 재단에 바쳤다는 소식 때만 해도 사람들은 분노보다 냉소했다. 하지만 최측근의 딸이 입학과 학사관리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사람들은 냉소보다 공분했다. 왜 그럴까.

최측근의 딸이 친분 관계를 통해 최상급 권력을 동원하고 대학과 대기업, 체육 단체를 주물렀다는 사실은 ‘노력하면 우리도 뭔가 얻을 수 있다’는 사람들의 판타지를 뚫고 나온 실재다. “돈도 실력”이란 글은 실재의 명징함을 언어로 각인시켰다. 사람들은 그렇게, 가난하고 힘없어도 노력해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기대, 능력을 갖추면 공정한 경쟁으로 언젠가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기대와 희망이 터진 풍선처럼 꺼진 자리에 남은 건 얻을 게 없는 자의 분노뿐이다.

지난 1월 서울대 경제연구소 경제논집에 실린 김세직·류근관 교수의 논문을 보면, 학부모의 지능 수준이 학생의 지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가상의 서울대 합격률을 산출했더니 서울 강남구 일반고는 0.84%로 강북구 일반고(0.5%)의 1.7배였다. 하지만 2014년 입시 서울대 합격률은 강남구 일반고가 2.07%로 강북구 일반고(0.11%)의 20배였다. 가상 확률과 현실의 차이는 서울대 합격률이 학생의 타고난 능력보다 부모의 경제력 차이에 따른 것이란 점을 뜻한다. 가상 확률은 말 그대로 판타지였다.

현실은 이렇게 거듭 엄연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최측근의 딸에게 “다들 정말 열심히 해서 이곳(이화여대)에 들어왔지”라고 말하는 이화여대생에게 열광하고 있다. 공분 뒤에 찾아온 이 방향 잃은 열광은 혹시 다시 판타지 속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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