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꽤 됐는데 왜 애를 안 낳아요?” 일상적으로 받는 질문이다. 애매하게 웃으며 답한다. “2세 계획이 없어서요.” 거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꼬치꼬치 캐묻는다. 아기가 얼마나 예쁜지 아냐, 애를 키워봐야 어른이 된다 등등. 무던한 나도 그쯤 되면 내면 깊은 곳의 미치광이가 기어 나올 채비를 한다. 심호흡하며 참는다.
주변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 꼭 있다. 애 안 낳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둥 출산이 애국이라는 둥 설교가 끝없다. 결국 내 안의 미치광이가 풀려나고 만다. “근데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네? 내 아기 예약이라도 걸어놓으셨어요? 애국하려고 애를 낳아야 해? 너나 열심히 하세요, 그 애국질!” 남성인 내가 이 정도로 스트레스 받는데, 여성인 나의 파트너는 오죽할까.
사생활 존중이란 걸 모르는 ‘한국적 오지랖’은 확실히 문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사람들의 무례함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다. 9월22일 인공유산 시술을 한 의료인을 더 강하게 처벌하는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이 입법예고됐다. 의사들도 반발하지만 무엇보다 여성들의 분노가 심상치 않다. 여러 여성단체가 손팻말 시위를 시작했고 온라인 여론도 격앙됐다.
중요한 건 이 분노가 단지 행정처분규칙이라는 제도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총체적이며 근본적이다. 국가가 여성을 어떻게 취급해왔는지가 사태의 핵심이다. 비현실적인 출산·보육 정책, 인공유산을 범죄화하는 제도,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과 모욕들…. 기나긴 세월, ‘한국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감내하던 고통의 질량에 비하면, 지금 겉으로 드러난 분노는 빙산의 일각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 즉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 수는 1.25명(2015년 기준)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여기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출산율 반등에 성공한 나라와 실패한 나라를 보면 왜 한국이 실패했고 앞으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보인다.
성공 사례는 스웨덴이다. ‘라테파파’로 상징되는 남성 육아휴직을 활성화하는 등 적극적인 육아휴직 정책으로 육아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었다. 한국처럼 회사에 따라 육아 환경이 극명하게 차이 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대부분의 기업에 예외 없이 육아휴직을 적용하게 만들었다. 스웨덴은 출산율을 수치적으로 높이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지 않았다. 남녀 임금 격차를 줄이는 등 양성평등을 강화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여성의 권리가 더 신장되고 삶의 질이 나아지면 출산율은 절로 올라가리라 본 것이다. 즉, 여성을 ‘인구 생산 장치’로 보는 한국과는 문제 접근 방식부터 달랐다.
실패 사례는 일본이다. 1989년 출산율 1.57을 기록한 이래 이 수치를 한 번도 넘어서지 못했다. 이후 수십 년간 ‘에인절 플랜’ ‘신에인절 플랜’ 등 저출산 대책을 내놓고 돈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의 극적 반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성들이 일과 양육을 양립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런저런 정책 패키지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걸 무력화하는 메커니즘에 전혀 손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노동의 비정규화와 비정규 노동의 여성화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일자리 안정성이 뿌리부터 흔들렸고 타격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집중됐다. 특히 1999년 개정된 근로기준법, 근로자파견법은 여성 노동자의 밤 10시 이후 심야노동을 강화하는 등 장시간 노동 확산,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불러왔다. 육아휴직 가이드라인이 정부 차원에서 제시됐으나 기업 규제 조항이 없어 유명무실했다. 보육시설 민영화로 보육의 질이 떨어져 여성들은 점점 더 출산을 꺼렸다.
말할 나위 없이 한국은 스웨덴보다 일본에 훨씬 가깝고, 심지어 일본보다 더 열악하다. ‘낙태하면 처벌한다’ 협박하고 출산·육아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기는 사회에서 출산율이 올라가길 바란다? 유니콘 등에 타고 바늘귀에 들어가는 게 빠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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