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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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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그 이상

⑮ 만화가의 타블렛: 어시스턴트와 행복한 동행 꿈꾸는 <아만자> 작가 김보통씨
등록 2016-03-24 16:45 수정 2020-05-03 07:17

적막한 사무실, 휑뎅그렁한 책상에 홀로 앉아 노트북컴퓨터를 켠다. 독자들이 보낸 고민이 쌓여 있다.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느라 보지 못했던 사연을 하나씩 살핀다. ‘죽고 싶다’거나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하소연이 많다.

웹툰(인터넷 만화)을 서비스하는 ‘레진코믹스’에 을 연재할 때는 하루 100통의 고민이 들어왔다. 6개월가량 쉬고 있는 요즘엔 10편 정도 온다.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거나, 재능이 없는 것 같은데 포기해야 하는 거냐는 질문을 본다. 주로 학생들이다. “그 나이에 재능을 발견하는 사람이 전 지구에 몇 명이나 되겠어요? 김연아도 아니고 아인슈타인도 아니고”라고 써놓고 고민한다.

‘노오오오력’을 해도 안 되는 사회지만, 분명히 노력이 필요하기도 한데, 답을 쉬이 달지 못한다. 이번엔 일본에서 온 고민을 살펴본다. “사회생활 하기 싫다, 사람들 만나기 싫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어쩜, 한국 독자들 질문과 똑같을까. “인간관계에 상처 안 받는 방법은? 둔해지거나 멀어지거나…” 이렇게 써놓고 만화를 어떻게 그릴지 생각에 빠진다.

고백했다 까인 한 남자가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있기는 한 거냐?”는 고민을 보내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주는 건 엄마도 못해요. 맥 빠지는 소리지만, 이 사실을 우선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에요”라는 그림을 그렸었다. 독자가 보낸 고민을 대충 위로하거나, 어쭙잖게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을 담고, 반전과 재치를 곁들여야 감동이 된다. 그가 애잔한 눈빛으로 편지를 읽는다. 김보통 만화가의 아침이 후다닥 지나간다.

독자의 고민으로 보내는 아침

보통씨가 펜을 든다. 전자펜 마우스. ‘타블렛’이라고 부르는 컴퓨터 그림도구에 토끼를 그린다. 한 대학 심리학과에서 의뢰받은 캐릭터다. 외주비를 받는 대신, 대학병원에서 아픈 독자들의 진료와 초기 검사를 해주기로 한 작업이다. 타블렛 왼쪽은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 오른쪽은 지우개(취소 버튼)를 비롯한 도구모음이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눈, 코, 입, 이빨을 그려넣는다. 눈과 눈썹이 저만치 떨어져 있다. 컴퓨터 도화지에 한 손은 그리고, 다른 손은 지우기를 반복한다. 콧수염을 그려넣자 토끼가 귀여워졌다. 귀 안쪽에 색을 입히자 밝은 토끼로 변신한다.

다른 도화지를 꺼낸다(파일을 연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청년 그림이 100여 장 그려져 있다. 수필에 들어갈 삽화다. 고개를 숙인 회사원을 그린다. 가르마를 타고, 머리카락을 조금 더 늘려본다. 선이 적고 눈코입이 단순하다. 머리 테두리를 단정하게 다듬는다.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 나올 때까지 그리기를 반복한다.

“제가 그림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어서 미숙해요. 먼저 스케치를 하고, 인물을 넣은 스케치를 하고, 그다음 그림을 그려요. 시간이 많이 걸리죠.” 과 의 주인공과는 다른, ‘김보통표 회사원’을 만드는 과정은 그리기와 지우기의 무한 반복이다.

고요한 사무실에 동료가 출근했다. 만화가의 작업을 지원하고 보조하는 어시스턴트 김미영(가명)씨가 맞은편에 앉는다. 김보통 작가의 곰돌이에 아트펜으로 색을 입힌다. 눈을 확대해 푸른빛 동공을 넣는다. 수박 반쪽을 닮은 입 크기를 바꿔본다. 영상으로 만들어질 캐릭터. 눈썹, 눈, 모자, 귀, 말풍선까지 곰돌이의 모든 신체가 따로 움직이도록 색칠하고 디자인한다. 열 손가락이 자판과 타블렛 위를 날아다닌다. 영상으로 변신할 캐릭터가 하나씩 완성된다.

만화가의 그림도구, 연필과 도화지는 전자펜과 타블렛으로 바뀌었다. 미술연필처럼 펜을 세우면 가늘게, 뉘면 두텁게 칠해진다. 힘 줘서 그리면 끝이 뭉툭해진다. 연필을 바꾸듯 심을 교체한다. 종류에 따라 스프링이 달려 붓처럼 써지기도 하고, 면봉처럼 사각사각하거나 매끄러운 느낌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9만원, 가난한 만화가가 쓰기엔 비싸다. 타블렛은 300만원이 넘는다.

처음 만화를 배우는 사람들은 10만원대 타블렛을 쓴다. 압력이 조절되지 않는 펜으로 연습장만 한 화면에 그림을 그리고, 연결해놓은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고친다. 연필로 스케치북에 만화를 그리는 일본 만화가들도 최근 디지털로 바뀌는 추세다. 프로그램은 주로 포토숍을 쓰지만, 일본 회사가 만든 만화 전문 소프트웨어 ‘클립스튜디오’가 편리하다.

보통씨도 얼마 전까지 싼 타블렛을 쓰다가 눈이 나빠져 새 걸 구입했다. 포스트잇에 그림을 그리다 이젤 캔버스로 바꾼 느낌이다. 고가의 타블렛과 컴퓨터를 사고, 비싼 프로그램까지 구입해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젊은이는 행운아다. “정말 만화를 그리고 싶으면 종이에라도 그리면 되죠. 그런데 노동력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요. 만화를 그리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좋은 타블렛을 사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죠.”

의 주인공 네로는 도화지를 살 돈이 없어서 널빤지에 숯으로 그림을 그렸다. 보통씨는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저렴한 타블렛을 선물하며 응원했다. 조만간 주말에 그의 화실을 개방해 청년들이 값비싼 타블렛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그런데 ‘네 그림이나 잘 그리라’는 비난에 괜히 마음이 움츠려든다.

그리기와 지우기의 무한 반복

보통씨는 신인이다. 2013년 올레 웹툰에 20대 암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로 데뷔했고, 지난해에는 탈영병 이야기를 다룬 를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는 ‘레진코믹스’에 연재된 만화 중 지난 1~2월 일본에서 가장 많이 본 만화 1위를 차지했다.

어릴 때 그림을 좋아했고, 상도 많이 받았다. 학교에서는 예고를 가라고 했지만, ‘가난한 그림쟁이’를 원치 않았던 아버지 뜻대로 대학 가서 회사원이 됐다. 는 회사 핑계 대고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는 헌병으로 근무하며 자신의 손에 잡혀 영창에 갇혀야 했던 탈영병에 대한 죄의식으로 썼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려내고, 구조적 모순을 바라보는 통찰력으로 개인의 일탈을 묘사하는 만화는 큰 울림을 줬다. “저에게 만화는 과거의 기억과 직면해 화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만화를 잘 그리지 못하고 엉성해도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가 다음에 그릴 만화는 고등학생 이야기다. 을 그릴 때, 한 학생이 ‘살 이유를 모르겠다’는 고민을 보내왔다. “당신이 주인공인 만화를 그려볼 테니, 그 만화를 보기 위해서라도 살아달라고 했어요. 그 친구 이름으로 밝고 신나는 만화를 그려볼 생각입니다.”

학교와 군대, 회사와 병원. 사람이 태어나 대부분 거쳐가는 곳의 이야기들이다. “회사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 회사라는 조직에 대한 분노가 너무 많아서 아직은 못 그리겠어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 그려야 좋은 점도 그릴 수 있을 듯해서 미뤄두고 있어요.”

지난해 1월이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공장 안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있었다. 전·현직 노동기자들이 모여 만든 에서 만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잠 못 자고 그림을 그렸다. 돈 한 푼 안 받고 그린 ‘창근씨와 정욱씨’라는 만화는 따뜻했다. ‘굴뚝인’들과 해고노동자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살아서 내려왔고 한 명은 복직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러다 기업 외주 못 받고 일 끊긴다고 걱정한다.

예전에 대기업 두 곳과 일하다 엎어진 적이 있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반기업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였다. “세월호 관련 삽화 작업을 했다고, 쌍용차 노조에 그림을 그려줬다고, 에 만화를 연재했다고, 퀴어페스티벌에 그림을 그려줬다고, 국제앰네스티에 외주 작업을 했다고 일을 주지 않는 곳이라면, 그 일은 안 해도 될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날 그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위해 그린 그림 앞에서,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문성근씨가 사진을 찍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기뻐하실 것 같아 흐뭇했다. 입 닫고 귀 막고 눈 감고 잘 팔리는 만화 만들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이 점점 살기 힘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보통씨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야기를 그린 이유

요즘 만화가는 ‘핫’한 직업이다. 웹툰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인기가 치솟았다.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 절반은 게임을 하고 절반은 만화를 본다. 웹툰 작가는 학생들이 선망하는 인기 직업이 됐다. 2015년 한국고용정보원이 진행한 재직자 조사를 보면 730개 직업 가운데 직업만족도 1위는 지휘자였고, 만화가는 4위에 올랐다. 만화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이 18개나 된다. ‘사교육 1번지’ 서울 강남 대치동에 만화 입시 전문학원이 인기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5년 6월 발표한 ‘웹툰산업 현황 및 실태조사’에 따르면 작가가 원고료를 지급받는 연재 작품은 4661편에 이른다. 작가의 월수익은 최저 120만원에서 최고 620만원. 레진코믹스와 네이버는 신인 작가에게도 최소 원고료로 월 200만원을 지급한다. 유료 콘텐츠 이용 수익이 2013년 16억원에서 2014년 112억원으로 7배나 증가했다. 웹툰을 서비스하는 플랫폼만 35곳에 이른다. 네이버에 ‘이말년 서유기’를 연재하는 이말년 만화가는 방송에 나와 자신의 연봉이 억대라고 했다. 레진코믹스는 소속 웹툰 작가 400여 명 중 26명이 월 800만원 이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웹툰이 인기를 끌고, 돈 내고 보는 독자가 늘어나면서 만화가로 데뷔할 창구가 많아졌지만 ‘먹고살 만한 만화가’는 일부 얘기다. 대부분의 만화가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부천만화영상진흥원이 저렴하게 쓸 수 있는 작업실을 마련했지만, 경쟁이 치열해 입주하기 어렵다. 뜻 맞는 만화가들끼리 공동작업실을 마련하기도 하지만, 보통 자기 집에서 작업한다. 보통씨도 를 연재할 때 어시스턴트 돈 드리고 나면 100만 원도 안 남았다.

만화가를 보조하는 어시스턴트는 말할 필요도 없다. 2년 전 한 유명 만화가가 문하생을 성추행해 구속된 사건은 어시스턴트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만화가는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동안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언어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고, 연이은 증언들이 쏟아졌다. 만화산업의 현황은 세세하게 조사하면서도, 만화를 보조하는 어시스턴트 노동에 대해서는 실태조사조차 이루어진 적이 없다.

“‘어시’(어시스턴트)님들이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고용도 안정되고 휴가도 낼 수 있고, 이 일을 하면서 미래를 생각할 수 있고, 가족을 꾸려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만화가는 부자가 됐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은 가난하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거죠.”

그는 최근 사업자등록을 하고, 미영씨를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종업원 5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는 근로기준법을 적용해 휴식시간도 보장하고, 월 이틀 휴가도 쓰게 한다. 그는 어시스턴트를 더 늘리고 월급도 올려줬으면 좋겠다. 의 윤태호처럼 어시스턴트를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4대 보험에도 가입해, 그만둘 경우 실업급여를 받게 하는 만화가들이 생겨나고 있어 다행이다.

실태조사조차 하지 않은 만화업계 노동 현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는다. 5분 전 여섯 시. “어시님, 퇴근 준비하세요. 오늘 하루도, 이번 한 주도 고생하셨습니다.” 김보통 만화가가 미영씨에게 인사를 건넨다. 조금만 더 하면 오늘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말을 끊는다. 주말에 푹 쉬었다가 월요일에 마무리하면 된다고 말한다.

작은 화실에 홀로 남았다. 얼마 전 3·8 여성의 날, 국제앰네스티의 의뢰를 받아 케릭터를 그려준 머그잔이 놓여 있다. 고독의 시간, 어쩌면 만화는 외로움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독자들의 응원과 위로로 밤길을 헤쳐나간다. 펜을 들어 만화를 그린다. 필치에 아픔을 담고, 채색에 온기를 입힌다. 뭉툭한 펜이 부조리한 세상을 예리하게 그리고, 싸늘한 컴퓨터 도화지가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세운다. 행복한 동행을 색칠한다.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 @ccomark, ccamcy@gmail.com

사진 노순택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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