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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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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억압당한 사람들의 나팔

㉓인권운동가의 확성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명숙
등록 2016-07-26 20:57 수정 2020-05-03 07:17

국가인권위원회 14층 회의실. 방청석 맨 앞줄에서 노트북을 켠다. 상임위원들을 바라보며 발언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는다. 첫 번째 안건은 ‘기업과 인권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의 건’이다. 2011년 유엔이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을 발표한 이후 9개국에서 이행지침 수립을 완료했고, 19개국이 추진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처음으로 추진 중이다. “서둘러 만들어도 사회적 인식이 따라오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기업들이 또 다른 규제가 아니냐는 우려가 불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영에 너무 많은 부담을 주면 안 돼요.” 인권위원들의 발언에 그녀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21쪽 맨 하단 인권을 ‘우선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경제, 안보, 모든 걸 고려해야지 인권만을 고려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선적으로’를 뺍시다.” 이성호 국가인권위원장의 말에 그녀가 항의하듯 큰 한숨을 내쉰다. 놀란 사람들이 뒤를 돌아본다. 소리치고 싶은 심정, 자판을 두드리는 손길이 거칠어진다. 다음 안건이 이어진다. “미등록 외국인까지 다 높은 수준의 보호를 어느 주권국가가 그렇게 하는지….” 휴~. 한숨이 깊어진다. 새누리당이 추천한 검사 출신 상임위원이다. 차관급 상임 인권위원 4명 중 셋이 판검사 출신이다.

“무엇보다 인권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람들이 ‘법망’에 갇혀 있어요.” 회의장을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편치 않다. 아시아 최초라는 껍데기는 차지하면서, 알맹이는 정부와 기업이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 속내를 뻔히 알기 때문이다. 터벅터벅 인권위를 걸어나오는 그녀 뒤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글귀가 회의실 벽을 장식하고 있다.

인권 감수성 없는 인권위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명숙(46). 그는 국가인권위원회를 감시하는 모니터링팀에 참여해 상임위원회와 전원회의를 방청하고 내용을 인권활동가들과 공유한다. 전날 전자우편으로 방청을 신청했는데 인권위에서 생년월일을 명기하라고 했단다. 회의를 방청하는데 불필요한 정보를 왜 써야 하냐고 했더니 동명이인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전화번호로 확인할 수 있는데, 황당했다. 그는 정보인권 침해로 회의 방청 신청서를 인권위에 진정하겠다고 했다. 결국 생년월일을 기입하지 않고 방청하게 됐다.

인권위를 나온 그가 광화문으로 향한다. 서울 전역에 유성기업 노동탄압을 알리는 공동행동의 날, 그녀는 종로를 맡았다. 현대차에 자동차부품을 납품하는 회사. 2011년 직장폐쇄 이후 노조탄압으로 고통을 겪다 3월17일 목숨을 끊은 노동자 한광호씨가 4개월 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국회 청문회와 법원에서 현대차가 유성기업 노조 파괴를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가 쏟아졌지만, ‘유전무죄’의 나라 사장님들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지난 5년, 회사를 출근하는 게 지옥 같았다는 노조원들의 우울장애 고위험군(43.3%)이 한국 성인 평균(6.7%)의 7배에 달한다. 인권이 사라진 일터는 지옥이다. 명숙이 유성기업 투쟁에 함께하는 이유다.

종로 거리 버스정류장, 그녀가 스티커를 붙인다. 충북 영동에서 올라온 유성기업 노동자, 쭈뼛거리는 그의 등을 두드린다. 스스로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도록 이끈다. 종각역 사거리에 현수막을 매단다. 함부로 떼지 못하도록 밧줄을 꽁꽁 동여맨다. 기업의 횡포를 꼭꼭 묶는다. 명숙씨가 손확성기(메가폰)를 든다. 유성기업에서 지난 5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장에서 노동자를 괴롭히는 것이 왜 문제인지 말한다. 따뜻하면서 강인하고, 부드러우면서 단호한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광화문 창공에 울려퍼진다. 인권운동가의 확성기, 언론이 외면하는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외치는 소리통이며, 목소리를 억압당한 억울한 이들의 나팔이다.

금속노조에서 빌려온 확성기는 최대 출력 35와트(W)로 시내에서 400m까지 소리가 나간다. 큰 건전지 8개를 넣으면 8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가격은 6만원 정도다.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 직후 광화문 앞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때는 어느 시민이 건네준 초소형 확성기로 2시간 동안 경찰의 해산명령에 맞섰다. 작은 건전지 6개가 들어가며, 최대출력 5와트로 소리가 작지만 가방에 넣어 다닐 수 있다. 1만5천원짜리다.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 앞 집회에서는 시민단체에서 빌려온 휴대용 소형 무선 마이크를 썼다. 가볍고 작은데 최대출력 25와트의 소리가 난다. 20만원이 넘는다. 명숙은 5만 명이 모인 촛불집회에서 소리 빵빵한 마이크를 잡은 적도 있지만, 작은 집회의 소형 메가폰이 좋다. 확성기는 현장에서 행동할 때 시민들의 마음을 모으고, 경찰의 해산명령에 쫄지 않게 하는 방어형 무기다.

2012년 7월, 명숙씨는 당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용산 참사를 다룬 영화 을 보러 갔다는 문자를 받고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현병철은 2009년 12월 국가인권위 전원회의에서 ‘용산 참사 관련 재판부 의견표명 안건’에 과반수가 찬성했지만 “독재라도 어쩔 수 없다”는 유명한 말로 회의를 파행시킨 사람이었다. 영화 상영 10분 전, 명숙은 숨을 헐떡거리며 무대에 올랐다. “용산 참사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서 제출을 막은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유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청문회 준비 때문에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정말 모욕적인 일입니다. 적어도 용산 유족들과 구속자들에게 사과는 하고 영화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권운동가의 목소리가 적막한 극장을 휘감았다.

극장에서 국가인권위원장을 꾸짖다

무대에서 내려온 명숙은 현씨 앞으로 갔다. 유가족에게 사과하겠느냐고 재차 물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한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저런 사람과 영화를 같이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맞아요. 같이 볼 수 없습니다.” “나가세요.” 관객들의 아우성이 쏟아지자 현병철은 황급히 극장을 빠져나갔다. ‘인권위 바로세우기 긴급행동’ 집행위원장 명숙의 활약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알려졌고, 곧바로 언론에 보도됐다. “인권운동가의 연장이라면, 몸으로 막아야 할 때는 몸이고 잘못된 일을 알려야 할 때는 목소리나 마이크겠죠.”

명숙은 2004년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했다. 빈곤층과 에이즈 환자의 건강권, 청소노동자의 권리, 노동권 등의 활동을 했다. 제주 강정 해군기지와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에 대한 인권침해 등 국가폭력 문제도 함께 했다. 케이티(KT)와 사무금융노동자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 조사와 연구를 하고 있다. 사랑방은 3년째 경기 안산·반월·시화공단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조직하는 활동을 한다. 얼마 전에는 공단 내 인권침해 실태 조사도 발표했다.

2011년 12월19일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명숙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당시 9만7천 명의 주민 발의를 통해 의회에 제출된 조례 제5조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는 성별, 종교, 나이, 출신국가, 장애 등과 함께 임신 또는 출산,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까지 담겨 있었다. 그런데 보수단체들이 청소년에게 동성애와 임신을 조장한다며 반발하자, 여야를 막론하고 시의회 의원들은 원안을 수정하려고 했다. 명숙과 인권활동가들은 청소년단체, 성소수자단체와 함께 서울시의회 농성에 들어가 마이크를 들고 6일 밤낮으로 인권을 이야기했고, 마침내 원안을 지켜냈다.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명숙이 힘을 쏟는 일 중 하나는 글쓰기다. 2014년 10월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에 참여해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이야기 의 2장 ‘가족의 방, 엄마의 자리’를 썼다. 세월호 참사 이후 ‘416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 단원고 희생 학생 부모 13명의 인터뷰집인 을 같이 출간했고, 지난해에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구술기록집 을 함께 펴냈다.

“사회단체활동가는 무엇보다 공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들을 개발하고 추진하기 위한 기획력 및 리더십이 요구된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논리적 분석력, 사회성, 글쓰기 능력, 남에 대한 배려, 책임감 등을 지녀야 한다고 사회단체활동가를 소개한다. 명숙은 그런 능력과 자질보다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려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인권운동가의 삶은 어떨까? 인권운동사랑방은 활동의 독립성을 위해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한 푼도 지원받지 않고 후원회비로 운영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과 멀어진 뒤로는 인권위 프로젝트 사업도 하지 않는다. 명숙을 비롯한 인권활동가들은 100만원도 안 되는 활동비로 생활하다 얼마 전부터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 교육이나 토론회 수입도 모두 사랑방에 반납한다. 규모가 있는 인권단체는 사정이 조금 낫지만, 작은 평화단체나 사회단체들은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활동비를 받는다.

많은 집회와 농성 현장을 찾아다니는 탓에 경찰에게 맞고 연행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7월21일 그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걷기대회와 장애인권활동가 김주영 장례식 행사의 일반교통방해로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다. 6월25일 새벽에는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 망루에 올라간 유성기업 노동자를 지키려다 경찰이 밀어서 바닥에 떨어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명숙은 친구들과 여름휴가를 몽골 고비사막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두 건의 일반교통방해 재판을 이유로 여권을 제때 발급해주지 않아 비행기를 예약하지 못했다. 대신 여름휴가를 제주에서 강정평화대행진으로 보낼 계획이다.

장애 인권 감수성 없는 사람들

정부나 기업만 인권 감수성이 없는 게 아니다. 며칠 전 한 집회에서 사회자가 ‘절름발이 정책’이라는 표현을 썼다. 병신, 등신, 불구, 벙어리, 바보…. 진보 지식인이나 노조 활동가들도 장애인을 비하하는 비유를 종종 쓴다. 특히 올해 육십갑자로 ‘병신년’이 되자, 많은 이들이 이를 빗대 대통령을 조롱했다. 민주노총은 “병신년은 장애인과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라며 “악의 없는 비유라도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면 버리고, 피할 수 있으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길”이라는 성명서를 냈다. 명숙은 노조와 단체에서 성차별과 장애인 차별 등 사회적 소수자와 관련된 인권교육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선전전을 마친 그녀가 민주노총으로 향한다. 멀리 경남 거제에서 올라온 대우조선해양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사회단체와 간담회를 요청했다. 이미 하청노동자 2만 명이 조선소를 떠났고, 내년까지 5만 명이 해고된단다. 벌써 거제에서만 하청노동자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춘을 조선소에서 보낸 용접공, 배관공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나야 하는 나라. 국민 세금을 노동자가 아닌 회사에 퍼다 주는 정부. 회사와 정규직 노조만 만나고 하청노동자는 거들떠보지 않는 정치. 이보다 더 심각한 인권유린이 없다. 가난한 하청노동자, 힘없는 비정규직의 손을 잡고 함께 인권을 외칠 나팔은 어디에 있을까 .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 @ccomark, ccamcy@gmail.com

사진 노순택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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