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역병기

등록 2015-10-14 10:26 수정 2020-05-02 04:28

지난 6월의 어느 한낮, 안부 전화를 받았다. “연락이 뜸해서. 혹시 혼자 죽었나 해서.” 나는 “하하, (아직) 죽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미세한 공포가 수화기를 타고 오갔다.
마지막 메르스 환자가 완치됐다. 곧 종식을 선언할 거라는 뉴스가 나온다. 역병기(期)의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아니,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인가? 선배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거의 초주검이었다. 감기가 독하게 왔다. 30℃를 웃도는 날씨였는데 이불을 싸매고 뜨거운 차를 종일 마셔도 몸이 덜덜 떨렸다.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줄곧 어리둥절하다 찾아온 파국

목이 찢어져라 기침을 하던 새벽, 침대에 누운 채 삼성서울병원의 지도를 검색해보았다. ‘슈퍼전파자’가 응급실에 있던 5월27일, 나는 삼성병원에 갔었다. 친구 할머니의 장례식이었다. 불과 30분 정도 머무른 뒤 병원을 빠져나왔다. 지도를 보니 장례식장에서 응급실까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병원에 갔다. 내가 삼성병원의 ‘삼’ 자도 꺼내기 전에 의사는 메르스가 아니라고 했다. 삼성병원 방문 사실을 말했을 때도 고개를 저었다. 잠복기인 14일이 지났다는 이유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중간에 어디서 누굴 만났는지 알 게 뭔가? 매일이 초조했다. 동선을 돌아보고 뉴스를 살폈고, 잠복기(자꾸 늘어났다)와 증상을 체크했다. 체온계를 사서 매일같이 열을 쟀다. ‘열이 오르면 어디로 가야 하지?’ ‘누구에게 뭘 물어야 하지?’ 생각하면서. 그렇게 거의 3주를 앓았다.

증상이 생기고 나서야 마스크를 썼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그전엔 내내 거리에서 마스크의 행렬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살겠다는 의지가 민낯으로 드러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적대적이었고, 또한 이상하게 비천했다. 나는 마스크를 한 세트 사놓고도 가방 안에 넣고만 다녔다. 그래놓고 가까이에 앉거나 가까이 지나는 사람들을 열렬히 증오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디에서 기인하는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밝혀내기를 스스로 피하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성숙한 시민의식’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뤄졌다. 발병 사실을 알고도 돌아다닌 사람, 자가격리를 거부하고 난동을 피운 사람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공공 위생 매너를 안 지키는 사람에 대한 험한 말들도 들끓었다. 격리된 채 가족과 인사도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의 애절한 사연과, 장례식장에서 거부당한 주검들이 거리를 헤맨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줄곧 어리둥절했다. 파국은 갑작스러웠다. 하루아침에 국가는 신기루가 되었고, 공중누각이 사라진 자리에 숨겨져 있던 생에의 의지가 앞다투어 전시됐다. 각자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벌거벗겨진 의지. 길가에 나뒹구는 생명.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뭔지 알 수 없었던 그 마음이 수치심이었다는 것을.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것이 뒤집혀 까발려졌을 때 거기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살아 있다는 게 이토록 남루할 수가 없었다. 원시시대도 아니고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남루하게 만들었나?

지금 거리에서 역병의 기억은 이미 사라진 듯하다. 사람들은 뒤집혔던 옷깃을 여미고 아무 일도 없었던 표정으로 거리를 걷고 있다. 남은 것이라곤 일회용 마스크들뿐인 것처럼 보인다.

생명을 유린한 괴물은 무엇이었나

그러나 이제 재난은 나의 삶 속에 분명히 들어와 있다. 내가 속해 있는 이곳이 상시화된 재난의 공간이고, 이대로라면 재난과 함께 살며 언제든 수치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난 9월29일 종식 선언에 즈음해 메르스 극복 백서가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쏟아져나왔다. ‘질병보다 무서운 심리적 공포’ ‘메르스 강타, 경기 침체’ ‘위대한 시민’ 같은 내용의 졸속 정리가 재난의 악순환을 끊을 수는 없다. 2015년 여름을 그저 ‘비루했던 한철’로 기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옷을 벗기고 생명을 유린한 괴물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로사 현대도시생활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