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강연 때문에 경상북도 의성군에 다녀왔다. 지난 연말에 인연을 맺은 ‘의성군민참여연대’라는 단체의 교양강좌에서 ‘왜 주민참여가 중요한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저녁 시간에 나이 지긋한 30여 명의 군민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었다. 참여연대라는 이름은 익숙하지만 중앙단체의 지부가 아니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라는 점에서, 그리고 대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만들어진 단체라는 점에서 의성군민참여연대의 창립은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시도다.
의성군민참여연대는 2014년 7월17일 50여 명의 회원이 모여 창립했다. 창립선언문을 보면 단체가 만들어진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애초에 지방자치란 주민에게 권한을 돌려줘서 그 주인됨을 실현하는 정치인데, “4년에 한 번씩 지방선거를 치르면서 후보자들은 온갖 선심성 공약으로 주민을 현혹하면서 주민의 공복이 되겠다고 약속”하지만 “당선 후 후보자 때의 약속은 사라지고 주객이 전도돼버린다”. 지방선거가 마치 자치의 모든 것처럼 얘기되다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주민들은 소외되고 군수는 지역의 왕처럼 군림하며 기득권 세력을 키운다.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 의성군수가 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새마을중앙회 의성군 지부장 출신의 초대 군수는 3선을 거쳐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군수에게 선거에서 두 번 패했던 사람이 그다음 군수가 되어 재선을 했는데, 심지어 두 번째는 단독 후보로 등록해서 무투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 군수에게 선거에서 한 번 패했던 사람이 현재의 군수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군수를 한다.
이러니 주민참여와 지방자치를 통해 지방권력이 민주화되기는커녕 문제점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창립선언문은 “공직자들의 비리와 부조리, 공동체 의식의 상실, 책임윤리의 실종, 관료주의, 이기주의, 안전불감증 등”이 지역사회를 갉아먹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이 커지면서 그와 관련된 비리와 부조리도 늘어나고 있다. 직전 군수는 국비보조금 160억원이 들어가는 건강복지타운조성사업을 부적합한 사업자에게 넘겨주고 특혜까지 제공해서 2014년 5월 불구속 기소를 당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전 군수가 하수관거를 부실 시공해서 사업비를 무려 325억원이나 낭비했고 양과 흑염소를 기르는 생태관광목장을 조성한다며 군 소유의 임야를 부당 거래한 사안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놀라운 점은 이 문제를 내부에서 고발한 공무원들이 징계를 받게 됐다는 것이다. 내부에서 이 사업의 문제를 지적했던 공무원들은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2013년 12월, 군민 2127명의 서명을 받아 감사원에 국민감사 청구를 했다. 그런데 가재는 게 편이라고, 놀랍게도 감사원은 특별한 이유 없이 감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패한 지방권력을 감시하려는 의로운 내부고발자들이 처벌을 받으니 공직사회의 비리는 더욱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누가 이런 문제를 책임질 것인가? 감사원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인가?
이런 상황이니 청년을 찾아보기 어려운 농촌에서 주민들이 직접 지방권력을 감시하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인이 그동안 주인으로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곧바로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머슴들이 주인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엄청나게 강화해놓은 상태이기에 주민들의 참여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방치하면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진다.
그나마의 지방자치제도도 흔드는 정부의성군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국에서 비슷한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군림하는 단체장, 무기력한 지방의회, 부패한 공직사회, 난개발과 생태계 파괴를 부추기는 업자들과 지역 언론, 무기력해진 주민참여, 이게 솔직한 우리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는 그나마의 지방자치제도조차 뒤흔들려 하고 있다. 2014년 12월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지방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지방행정에 주민참여를 확대하며 기초자치단체에 자치경찰단을 설치하는 등 그동안 시민사회가 요구해온 방안이 다루어졌지만 특별시와 광역시의 기초의회를 폐지하고 단체장과 교육감 직선제를 변형하는 등 지방자치의 흐름에 역행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방식을 대부분 수용해서 추진하려 하고 있다. 이 계획이 앞서의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들 똑같은 놈이라며 냉소할 수 있지만 결국 주민이 나서야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 공무원들은 돈이 없어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투덜거리지만 지방정부의 예산은 부족하지 않다. 의성군의 경우 2014년 예산을 기준으로 재정자립도가 6.05%에 불과하지만 중앙정부의 교부세와 보조금을 합친 재정자주도는 63.53%다. 중앙정부의 사업을 대행하지만 어떤 식으로 할지는 지방정부가 결정할 수 있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돈을 제대로 쓰지 않는 게 지방정부의 문제다.
그냥 두면 4천억원이 넘는 예산을 몇몇 사람이 좌지우지한다. 두껍고 어렵지만 지방정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예산서를 보며 지방정부가 어디에 얼마를 쓰는지 감시하는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 물론 예산서에서 문제점을 발견한다고 해도 곧바로 해결되는 건 아니다. 의성군민참여연대가 의성군의 2015년 예산서에서 문제들을 찾아내 군의원들에게 예산을 삭감하라고 요구했지만, 군의회는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느냐며 군청 편을 들었다고 한다. 촘촘하게 얽힌 이해관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전처럼 드러내놓고 기득권을 추구할 수는 없다.
요즘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명분보다는 집요함을 권한다. 부조리에 대한 분노는 폭발적이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한국처럼 여기저기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곳에서는 감각이 무뎌진다. 부조리를 터뜨리면 되는 게 아니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스토커처럼 지방정부를 감시해야 그 민낯을 대면할 수 있다. 지방정부에 민원을 넣어도 몇 년씩 집요하게, 하나의 사안을 여러 명이 돌아가며 집요하게 다뤄야 조금씩 사회가 바뀐다. 끈기와 집요함, 우리 시대 민주시민의 덕목이다. 그 대가는? 최소한 저런 놈들에게 시시하게 당하지 않겠다는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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