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되었다. 식량주권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시위가 이어지지만 대안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듯한 농촌. 그나마 농업은 입에 올려도 농민들이 사는 마을은 도시민들의 관심 밖이다. 1999년에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의 농촌과 농민, 과연 농촌마을은 지속될 수 있을까?
농민회 중심으로 연 면민체육대회
이런 상황에서도 도시의 소비자들은 친환경 농산물을 찾는다. 농민이 사라지고 나면 누가 농사를 지을까? 노예처럼 일하는 이주노동자가 생산하는 친환경 농산물이라는 모순에 빠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지금 이대로라면 끝이 분명해 보이는 농촌, 다른 대안은 없을까?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은 농촌형 주민자치의 중요한 사례로 거론된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안남면의 지역발전위원회를 이끄는 주교종 위원장은 이곳이 고향이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인 1960년대 말만 해도 농촌에 사람이 많았다고 기억하는 주 위원장은 농대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학 시절 문화운동을 했고 농산물을 서울에서 잠깐 팔기도 했던 주 위원장은 1987년의 민주화 운동 바람이 지나간 1988년 여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이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에 있었던 주 위원장은 귀향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마을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했고, 1990년에는 함께 농민회를 창립했다. 농촌에 돌아오니 농협 조합장들이 마을을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이장이나 군의원들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이거 하나는 바꿔야겠다고 마음먹고, 이장협의회와 대립하면서도 농민회 중심으로 면민체육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마침 2001년부터 동사무소가 주민자치센터로 전환되자 주 위원장은 주민자치위원회 간사로 들어갔다. 2005년에는 농협 조합장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돈 뿌리고 아는 인맥을 조직하는 선거 방식에 밀려 떨어졌다.
그 뒤 다시 조합장 선거에 출마할 기회가 있었지만 다른 식으로 마을을 바꾸기로 마음먹은 주 위원장은 패거리를 만들지 않겠노라 결심한다. 패거리를 만들어 뒤에서 논의하지 말고 공식 회의 때 안건을 논의하고 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진행하자,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어려운 길을 묵묵히 걸었다. 결이 다른 사람들도 만나면서 안남식으로 소통해보자 마음먹었다.
주민들 이어주는 ‘도서관 순환버스’
그러면서 주민자치위원회가 우체국, 학교, 보건소 등으로 점점 논의를 넓혔고, 2007년에는 지역발전위원회라는 회의 기구가 탄생했다. 대청호 상수원 지역이라 받는 주민지원사업비 일부를 안남면 발전을 위한 종잣돈으로 모으고, 농민들이 직접 지역의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2개 마을의 이장만이 아니라 주민이 추천한 마을위원 12명, 또 이들 24명이 추천한 12명, 모두 36명이 지역발전위원회를 운영했다.
2006년 말, 지역 주민들은 도서관설립추진위를 만들었다. 주 위원장은 그 계기를 겨울철 눈이 많이 왔을 때 학생들은 모두 등교했는데 외지에 사는 선생님들이 출근하지 못했던 사건으로 기억했다. 6학년들이 불을 때서 동생들을 돌봤던 그 사건으로, 면에서 일하지만 면 밖에 사는 사람들도 함께 살 수 있는 동네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농촌도 사람 사는 곳인데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면 갈 곳이 없고, 각기 떨어진 마을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자연히 아이들을 매개로 어른들이, 여성들이 만날 곳도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도서관설립운동은 ‘희망의 도서관 만들기’ 사업에 선정돼 급물살을 탔다. 농협에서 땅을 무상 임대받고 지방정부의 지원비를 받지만 운영은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한다. 도서관 순환버스는 서로 멀찌감치 떨어진 농촌마을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도서관 소식지인 은 면 단위의 마을신문이다.
주 위원장은 10년 뒤의 마을을 생각하고 하나씩 준비하다보면 방법이 보인다고 말한다. 마을은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을까? 마을이 단순히 돈이나 선거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기에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안고 함께 가야 길이 보인다고 주 위원장은 말한다. 주민들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도록 여러 디딤돌을 놓으면 서로 싸우더라도 함께 갈 수 있다. 도시와 달리 농촌마을은 지지고 볶고 싸워도 다시 만날 수밖에 없으니. 지금도 회의를 짜고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주 위원장의 굳은 의지다.
‘도농교류센터’도 마을 사람이 먼저 이용하자
주 위원장은 ‘안남식’을 강조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귀농·귀촌하는 사람들을 유치하려는 지방정부의 정책이 여럿 나오고 있지만, 주 위원장은 우리가 재미있게 열심히 살다보면 외부에서도 그걸 보고 같이 하지 않겠느냐는 식이다. 농촌의 고령화 문제도 국가가 해결할 의지가 없으니 우리 스스로 생활할 체계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려면 의사 결정 과정을 최대한 지역화해서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야 지역 유지나 ‘새끼 유지’가 재생산되고 선배 따라 유세하는 분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남면에도 농림축산식품부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도농교류센터가 있다. 센터 유지가 잘되느냐고 묻자 주 위원장은 도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 피곤해서 어떻게 사나, 라고 되묻는다. 도농교류센터도 마을 사람들이 먼저 이용하자, 회의하고 밥 먹고 필요할 때 쓰고. 그러다보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할 일도 보이고. 외지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마을을 위해 일하다보면 대안이 보인다. 당연히 이 모든 변화가 주 위원장만의 힘으로 이뤄진 건 아니다. 농민회와 지역발전위원회에 함께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가능했다. 이것이 안남식 공론장의 힘이다.
밀려오는 파도를 막지 못한다고 해서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위태롭게 흔들리지만 아직까지는 농촌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자기 스타일을 지키는 농민들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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