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방자치단체장들은 마을에 관심이 많다. 신도심의 아파트 단지에도, 구도심의 주거지에도 온통 마을이다. 그러면서 마을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떠돈다. 마을공동체, 마을만들기, 마을기업, 마을복지, 마을재생, 마을도서관, 마을인문학, 마을민주주의 등 ‘마을’만 붙이면 뚝딱 새로운 대안이 만들어진다.
마을이 얘기되면서 주민들도 점점 바빠진다. 축제를 열고 거리도 정비하고 벽화를 그리고 공간도 만들고 기업도 세우고 카페나 도서관도 만들고. 마을이란 말에 걸맞게 일을 진행하려면 품이 많이 든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회의 시간도 길어진다. 이렇게 길고 힘든 과정인데도 ‘마을에서 함께 사니 행복해요’라는 주민이나 활동가들의 인터뷰가 언론에 계속 실리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나는 마을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본다. 보통 마을은 현대사회에서 개별화되고 끊어진 인간관계를 다시 연결하고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얘기된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맺어지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처럼 만난 사람은 또 헤어지기 마련이다. 인간관계에서 잘 만나는 것만큼 잘 헤어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요즘 얘기되는 마을에는 어떤 헤어짐의 과정이 있을까? 여러 지역을 다녔지만 잘 헤어지는 마을에 관해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마을을 권하는 사람들은 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무조건 만나라고 한다. 그러면서 만남의 동기는 사라지고 이런 맹목성은 만남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지방정부의 ‘사업’이 되는 순간 마을은 만남의 광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만나고, 그러다보니 그 자리에 끼지 않으면 욕을 먹는다. 만남이 의무나 일자리가 되는 셈이다.
왜 만남은 강요되고 헤어짐은 무시돼야 할까? 이런 만남이 굳어지면 합의도 강요된다. 만남은 합의를 전제하고, 소수의 의견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은, 애초에 합의될 수 없는 것은 의제조차 되지 못한다. 서로 만나기 어려운 것들은 헤어져 있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마을은 좋은 것들만 뭉뚱그리는 기이한 블랙홀이 되고 있다.
마을과 관련된 이런저런 자리에서 많이 받는 질문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같이 살아야 하나, 소통이 어려운 사람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나, 이런 것들이다. 보통은 힘들면 관두시라고 권한다. 억지로 함께 살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다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낯선 타인일 뿐이고 내가 그렇게 믿을 뿐이니, 다르다고 한 명씩 지워가면 결국 소수의 공동체가 될 거라고 답한다. 힘든 사람을 억지로 붙잡지 말고 대신에 그 사람이 다시 들어올 수 있는 문을 항상 열어두라고 답한다. 헤어질 때도 알아야 함께 살 수 있고, 돌아오는 사람을 환대할 수 있어야 마을 아닐까? 그러니 함께하는 것만큼 과감하게 헤어지는 법도 필요하다.
226개 중에서 80여 개 시·군이 걸린 규정이렇게 헤어지는 과정을 어렵게 하는 것은 바로 선민의식(善民意識)이다. ‘착한 사람’ ‘좋은 마을’이라 불릴수록 자기 손에서 놓는 법을 알지 못한다. 특히 내가 타자를 위해 뭔가를 더 하고 있다는 의식은 타자도 노력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타자를 위함은 타자와 나를 평등한 위치에 두지 못한다. 평등하지 않은 관계가 좋은 관계일 수는 없기에 그 착함은 자신과 타인 모두를 속이는 위선일 수 있고 때론 폭력이 되기도 한다. 청년, 청소년으로 내려갈수록 이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좋은 마을을 왜 떠나?’라는 물음이 바로 마을을 떠나는 이유다.
마을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또 하나 놓치고 있는 부분은 중앙집권형 국가에서 마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나는 서울특별시나 수도권 신도시에 살기 좋은 마을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복잡하게 주판알을 튕겨야만 계산할 수 있는 공간이고 기득권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좋은 마을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 마을이 지속되기는 어렵다. 마을의 역량으로는 지나치게 집중된 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주민을 몰아내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그 힘의 반영이다.
그렇다고 비수도권 지역이 긍정의 대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미 자급력을 잃어버린 곳이 대부분이고, 지금도 지역의 힘은 계속 약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방자치단체의 교육경비 보조에 관한 규정’이라는 법이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지방세와 세외수입을 합쳐도 공무원의 인건비를 댈 수 없는 지방정부는 교육경비를 지원할 수 없고 이를 어길 경우 그만큼 지방교부세가 줄어든다. 2014년부터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80여 개의 시·군이 이 규정에 걸렸으니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다. 이로써 기초자치단체가 학교의 급식비나 교육환경 개선비, 교육과정 운영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심각한 사안인데도 이것을 진지하게 다룬 언론사는 한 곳도 없었고, 해당된 지역의 언론들만이 이 답 없는 문제를 무기력하게 다뤘다.
답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정자립도가 취약한 지역은 소수의 대도시 자치구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농촌이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농촌이나 지방의 마을 붕괴를 막기 위해 추가로 지원해야 할 터인데 현실은 정반대다. 모순된 상황이 2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언론은 없고, 이것은 여론을 장악한 언론이 대부분 중앙언론이고 지방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경상남도의 무상급식 중단도 홍준표가 아니었다면, 그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까?) 기본적인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마을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상황에서 마을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위선이라고 본다.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마을로 내세운 가치를 스스로 배반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이런 주장에 가치만 너무 내세운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두를 위해, 마을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은근히 자신이나 자기 조직의 몫만 키우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대나무숲에서 끊임없이 들려온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이, 사회를 바꿀 방법들이 왜 마을로만 수렴돼야 할까? 마을이 대안이라는 이야기는 보수와 진보, 좌와 우를 막론하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애매한 개념이 되어버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그동안 마을을 주장해온 나의 자기반성이자 다른 길을 걸어가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그동안 칼럼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땡초*‘하승우의 오, 마을!’ 연재를 이번호로 마칩니다. 마을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신 필자 선생님, 그리고 늘 지켜봐주신 마을 여러분,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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