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꼭 물리적 공간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송기숙의 (화남·2005)에 나오듯 “네 것 내 것 꼼꼼히 따지지 않고 살아가는” 마을은 복잡한 도시에서 다른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마을이라 불리지 않지만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단체도 그런 공간이 될 수 있다. 단지 가치나 목적만을 내세우지 않고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하며 다른 세상을 고민하는 틀이 된다면 말이다.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책마을
땡땡책협동조합은 내게 마을과 같은 공간이다. 당장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어렵지만 책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주고받을 게 많은 사람들이다. 땡땡책협동조합의 정관은 “우리는 함께 책읽기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이웃과 연대하며 자율과 자치를 추구하는 독서 공동체로, 건강한 노동으로 책을 만들고 합당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간다”고 설립 목적을 밝힌다. 조그만 단체가 거창한 목적을 내세운다고 타박받을 수 있지만, 이 목적은 처음 조합을 만들기로 했던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모아서 만들어낸 우리의 존재 이유다. 마을헌장이라고나 할까.
최근 우리 마을을 달구는 뜨거운 주제는 “건강한 노동으로 책을 만들고”라는 부분과 관련돼 있다. 책을 소비하는 독자로서 책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가지자는 것인데, 한국의 출판사에서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편집자라 불린다.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니 출판노동자라 불리는 게 맞지만 책이라는 물건의 특수성과 정신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 사회의 경향이 다른 호칭을 만든 것 같다. 무거운 교정지를 들고 퇴근해서 주말 내내 낑낑거려도 수당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이들이 출판노동자들인데도 말이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니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순 없지만 출판사의 소유 구조를 보면 그 내부를 짐작할 수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고상한(?) 호칭과 달리 한국 출판사들의 소유 구조는 매우 가족적이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대형 출판사들은 대부분 족벌회사다. 할아버지가 회장, 아버지가 사장, 그 자식들이 부장, 이런 식이다. 한때 트위터를 달궜던 ‘출판사 옆 대나무숲’에는 “북한도 삼성도 출판계도 가계 세습을 한다. 난 이 출판사가 좋았던 게 사모는 다른 일 하느라 출근을 안 하고 사장 자녀들이 어려서였다”는 이야기, “사장 집에서 8살짜리 사장 딸이랑 사장 딸의 방학숙제인 4절지짜리 모자이크 해보셨어요?”라는 한탄이 올라오기도 했다.
편집자들은 때론 기획자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자기 기획에 맞는 책을 만들려면 ‘사장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책 만들어서 안 팔리면 네가 책임질 거냐, 라는 추궁에서 출판노동자는 자유롭지 않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시장에서 1인 출판사가 계속 만들어지는 현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출판사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엄청나게 낮다는 점이다. 서점과 실제 거래하는 3천 개 이상의 출판사 중에서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단 8곳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삼성 창업주 이병철씨의 억지는 삼성만의 것이 아니다. 내부의 견제 장치가 없으니 출판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이 심해지고 노동조건은 나빠져만 간다. 어느 곳이건 내부의 문제와 모순이 있겠지만 책마을의 상황은 좀 심각하다.
해명을 요구하면 사직으로 답하네2014년 9월, 김난도 교수의 를 유행시켰던 출판사 쌤앤파커스에서 상무로 일하던 사람이 여성노동자를 성추행한 사건이 공론화됐다. 정규직 전환을 앞둔 여성노동자를 자기 오피스텔로 데려가 옷을 벗으라고 요구하고 강제로 입을 맞췄다. 특별한 판단이 필요하지 않은 상식적인 사건인데, ‘저항이 없었다’는 이유로 법원은 면죄부를 줬고, 회사는 상무를 복직시켰다. 논란이 생기자 출판사 대표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를 수습하는 듯했으나 뒤로는 진술서를 써서 무죄 선고를 도왔다. 이에 언론노조 출판분회가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자 대표는 11월24일 돌연 대표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하고 회사를 떠났다. ‘사퇴’라고 말하지만, 대표의 회사이니 ‘매각’이 분명한 표현이겠다.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난 걸까?
2013년 부당징계와 노조탄압으로 논란에 휩싸였던 그린비출판사에서는 최근 다시 노조원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노조를 부정하던 전 대표가 ‘사퇴’한 뒤 1년여간 기존 관리직에 의해 운영되다 최근 회사 경영이 어렵다며 새로운 대표가 취임했다. 새 대표 취임 시기에 맞물려 회사는 경영이 어렵다며 기존 관행과 노사 협약을 무시한 채 근태 조건을 후퇴시켰다. 백번 양보해 어려우면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치자. 그런데 매출 위기라던 그린비출판사의 유일한 주주인 전 대표는 2013년 당기순이익에 맞먹는 금액을 배당받았다. 그는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난 걸까?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은 적 없다 48%쌤앤파커스와 그린비출판사의 대응을 보면 한국의 경영주들이 사내 문제에 대응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그 문제를 부인하거나 그 문제와 자신을 분리시키고 진상을 알아보겠다며 시간을 번다. 회사에 노조가 생기고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의견을 내면 함께 해결하기보다는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라 그렇다, 너희는 노동자가 아닌데 무슨 노동조합이냐, 이런 식으로 대하다 안 되면 그냥 회사를 정리하거나 떠난다. 하지만 노동자와 달리 그들은 회사를 떠나도 이해관계를 놓지 않는다. 나는 떠났으니 이제 그 문제와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 내막은 아무도 알 수 없다.
2014년 8월25일부터 10월31일까지 언론노조 산하 출판노조협의회는 출판노동자 51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를 보면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은 적 없다’는 답변이 48%였고, 성희롱 가해자는 상사·저자·역자 등이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사람이 응답자의 22%, 생리휴가를 쓸 수 없다는 사람이 48%, 야근에 대한 보상이 없다는 응답자가 75%나 되었다. ‘부당해고 등 출판노동자의 생존권 문제에 대응해달라’는 응답자가 384명이나 되었다. 이런데도 출판계에서 벌어지는 많은 노동탄압 문제들이 오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취향의 공동체를 넘어설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그 취향을 가능케 하는 노동과 대면하고 그곳의 노동자와 손을 잡는 것,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땡땡책협동조합은 이상한 책마을을 건강한 책마을로 바꾸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이웃과 연대”할 생각이다. 마을의 힘은 그런 게 아닐까? 함께 살자, 희망은 저기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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