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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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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소리 들리세요?

등록 2014-12-29 15:19 수정 2020-05-02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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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년 전, 은 2014년 신년호의 표지에 ‘어떤 천국’이라는 네 글자를 적었습니다. 취재기자가 먼 길을 떠나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종교의 도처에 균열을 내고 있는” 이들을 만난 이야기를 전했었죠. 하지만 분명히 기억합니다. 예쁜 표지로 꾸민 신년호의 또 다른 지면은 전국철도노동조합의 파업을 계기로 노-정이 날카롭게 맞서고 있는 세밑의 대치 정국 이야기로 채워졌습니다. 정부는 철도노조 집행부를 체포하겠다며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쳤죠. 이렇듯 현실은 언제나 꿈을 배반하는 모양입니다.
여전히 칼바람 부는 하늘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년호에 보내온 편지 몇 구절을 옮겨보렵니다. “안녕하세요. 2층에 살고 있는 강성덕입니다. 2014년 12월13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이창근·김정욱 동지가 굴뚝 위에 올라선 뒤부터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층엔 코오롱의 최일배(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장) 동지, 2층엔 씨앤앰 비정규직 해고노동자인 저와 임정균 동지, 3층엔 차광호 스타케미칼(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 동지, 4층에선 쌍용차 동지들이 집을 지어야 하는 사실이 웃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25m 광고탑에서 45일째(2014년 12월26일 기준) 하늘을 견디고 있는 씨앤앰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강성덕씨의 마음입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자유시간’이다. 명상을 하거나 책을 읽고, 굴뚝 농성장 구석구석을 정리하기도 한다. 페이스북을 하고 지인의 안부전화도 받으며 2시간을 보낸다. 추위 속에 혼자 있다보면 한여름의 뜨겁던 햇빛이 그렇게 그리울 수 없다. 자유시간에도 굴뚝을 거니는 일이 많아졌다. 소변을 얼린 페트병을 모아 굴뚝 한쪽에 벽돌처럼 쌓아올린 뒤 그 위로 비닐을 쳐 바람을 막았다. 맞바람은 피할 수 있지만 한겨울 냉기는 ‘소변 벽’으로도 차단할 수가 없다.” 구미국가산업단지(경북 칠곡)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는 굴뚝에서도 철저하게 시간을 지키며 운동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는 213일째 홀로 하늘에 있습니다.
이들이 보내온 글을 되뇌어 읽던 중, 문득 10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진 고 정은임 MBC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2003년 10월22일 방송된 오프닝 멘트를 기억하시나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중 129일 만에 목숨을 끊은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고 김주익씨 사연을 전하던 중이었죠. “새벽 3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굴뚝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또 다른 ‘하늘 사람’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말하려고 올라왔는데 말을 잃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먹고, 자고, 견디는 것은 수단이다. 수단이 본질이 될까 두렵다”고.
새해엔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목소리가 오롯이 전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2015년 신년호에 담아본 아주 작은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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