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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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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와 곰팡이를 걷어내다 ‘웬수 같은 책방’을 사랑하게 됐다

은모래마을책방 개업식에서 눈물이 주룩주룩…노동은 사랑을 부르고, 사랑은 노동을 부른다
등록 2025-02-01 12:28 수정 2025-03-05 09:56
2024년 7월27일 열린 경남 남해 은모래마을책방 개업식. 김소민 제공

2024년 7월27일 열린 경남 남해 은모래마을책방 개업식. 김소민 제공


겨울, 손님 없는 책방에서 으슬으슬 떨고 있다보면, 가을은 언제 오느냐고 누군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던, 길었던 지난여름이 가물가물하다. 온몸이 땀에 절어 내 냄새에 내 코가 마비될 거 같은 날들이 진짜 있었던 건지 싶다.

2024년 7월 공기는 불길한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개업식도 하기 전인데 울고 난 눈두덩처럼 책들이 부풀어 올랐다. 에어컨을 온종일 켜둬도 원래 목욕탕 건물이었던 책방은 물기를 옴팡지게 물고 놔주지 않았다. 종이가 늙어가듯 주름졌다. 그리고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책방의 겨드랑이, 등판, 손톱 같은 책과 책장 사이에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책을 모조리 꺼내고 곰팡이를 닦아냈다. 하수구는 삼킨 물을 다시 토했다. 책방엔 하수구 냄새가 뱄다. 물기에 책방 앞 잡초들은 거침없이 자랐다. 이 웬수 같은 책들. 책의 물성이라면 지긋지긋했다. 모든 무게 있는 것들이 저주 같다. 내 피부에선 땀인지 눈물인지 짠맛이 났다. 그땐 그렇게 비가 내렸던 거 같다.

괴로움이 비가 되어 주룩주룩

모순인 감정이 반대 방향으로 세차게 잡아당긴다. 기대고 싶은데, 간섭당하고 싶지 않다.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벽면을 흰색으로 칠하고 있을 때다. 혼자라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민다. ‘추상화를 그린다고 생각하자. 무제 478번.’ 동고동락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빵집의 동글동글하고 작은 여자, 밥때마다 나를 먹이는 여자가 도와주러 와 묻는다. “왜 흰색으로 칠해? 물결무늬 유리 넣기로 한 거 아니었어?” 글쎄, 왜 흰색으로 칠하고 있을까? 확신이 없다. 돈이 없다, 사람이 없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해명’을 한다. “매대는 왜 여기 있어?” 글쎄, 왜 거기 있을까? 또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다 설움이 몰려온다. 이게 내가 나에게 덫을 놓는 방식이다. 상대에게 내게 닥친 문제들, 내가 잘 못하는 것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오랜 세월 썼던 애정을 구하는 수법이다. 상대를 조언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는다. 상대가 이런저런 해결책을 내놓으면 이런 마음이 올라온다. 간섭하지 마! 내가 바보야? 그 사람이 선을 넘지 않을까 불안해진다. 어디쯤 경계를 그어야 할지 헷갈린다. 어쩌라는 걸까? 언제까지 이런 방식의 쳇바퀴를 돌 건가? 그날 온종일 빵집에서 노동하느라 스스로 반죽이 돼가고 있는 작고 동그란 여자에게 난데없이 울컥했다. “지금 지적이 아니라 지지가 필요해요.” 흰색 페인트가 뚝뚝 떨어지는 붓을 든 나는 결국 관계를 파탄 내버린 게 아닐지 두려워진다. 밀가루로 희끗희끗해진 앞치마를 두른 여자의 어깨와 눈썹이 둥근 포물선을 그린다. “자기 정말 이제까지 열심히 했어.”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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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마음이 구석구석

큰맘 먹고 산 라탄 방석 위로 곰팡이가 내려앉았다. 뭘 잘못했는지 책방 이메일 하나 만들려고 인증을 하도 많이 해, 내 핸드폰으론 인증이 되지 않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의 저주에도 걸렸다. 잘못한 주문을 취소하려면 이메일을 열어야 하는데, 인증이 안 된단다. 명함엔 주소를 잘못 적었다. ‘이 시골에서 책방이 될 리가 없잖아? 이제 곱셈도 헷갈리는데 장사를 한다고?’ 몸과 마음이 지쳐 더는 못하겠다고 책방 멤버인 인간에이아이(AI)와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동고동락협동조합 이사장)에게 카톡으로 통보한 다음날 아침, 책방 불을 켜니 동굴 같은 공간에 어수선하게 책들이 널려 있다. 그 두고 꼴을 차마 떠날 수 없다. 책방이 반려견 몽덕이 같았다. ‘여기 풀을 뽑아줘, 여기 냄새를 잡아줘, 여기에 꽃을 놓아줘.’ 이 웬수 같은 책방이라니. 화장실에 트랩을 설치하고 화분을 들여놓고 행주로 구석구석 닦았다. 책방의 필요가 자꾸 들리고 이 공간의 표정이 보인다. 책방은 내게 더 이상 물체가 아니었다. 이 웬수덩이를 사랑하게 된 거다.

그리고 사람들이 왔다. 전국에 흩어져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는 은모래마을책방의 주인들 ‘삶전환연구소’의 멤버 세 명이 책방 대문을 파랗게 칠한다. 오른쪽이 삐죽 올라가서 왼쪽을 올렸더니 다시 오른쪽을 올려야 한다. 대문의 푸른 경계가 이러다 천장까지 치고 올라갈 기세다. 한 여자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다른 여자는 책장 위치를 바꿔준다. 내가 한 달 동안 손톱만 물어뜯고 결정짓지 못했던 공간 구획을 친구들이 몰려와 하루 만에 해치운다. 친구 넷이 소파와 의자를 나르고 벽돌로 다리를 세워 선반을 얹는다. 다른 친구는 책갈피, 명함, 포스터를 아무런 조건 없이 만든다. 집주인인 ‘신발달인’이 제습기를 선물했다. “소중한 건 지켜야지.” 이제 이 웬수 같은 책방은 내 노동의 증거일 뿐 아니라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돼버렸다.

2024년 7월27일 은모래마을책방 개업식, 동그랗게 둘러선 사람들은 리본 대신 기다랗게 연결된 가래떡을 들고 함께 잘라 먹었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가래떡은 몽덕이의 배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이네켄 맥주의 빈 깡통을 밟는 코끼리에 대한 단문’을 윤독했다. 동물원이 폐쇄되면서 늙은 코끼리는 갈 곳이 없었다. 어느 시골 동네 사람들이 코끼리를 데려온다. 마을 사람들은 코끼리에게 일을 주기로 한다. 일을 주는 게 일이다. 코끼리 발 모양에 맞춰 콘크리트파이프를 만들고, 피리 소리가 나면 코끼리가 그 파이프에 발을 넣어 캔을 밟게 훈련한다. 압축기 하나면 뚝딱 해치울 일인데 말이다. 소설 속 화자는 마을 사람들이 코끼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주고 싶어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굳이 노동으로만 존재의 의미를 증명해야 해? 아마도 이건 코끼리에게 투사된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일 거다. 그 누가 됐든 무리 속에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사람들, 무리 속에 자기 자리가 있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말이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

사실, 나는 이 책방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시골 마을에 책방이 들어선다고 지역소멸이 멈추기라도 하나? 사실, 내가 왜 사는지도 잘 모른다. 왜 아침마다 일어나 밤이면 굴러떨어질 공을 죽기 살기로 굴려 올리나? 꼭 내가 이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지 않나? 시간은 인간 따위는 가차 없이 밀고 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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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책방 개업식에서 내가 흘렸던 그 이상한 눈물을 기억한다. 기뻐서도 슬퍼서도 감동적이어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물리적인 눈물이었다. 몸의 진기가 물기가 돼 배수구를 통해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노동은 사랑을 부르고, 사랑은 다시 노동을 부른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중요한 건 그뿐인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김소민 은모래마을책방 지기/희망제작소 연구위원

*‘인간관계 신생아’인 중년 여성과 간식 말곤 관심 없는 개의 도시 탈출 합동 도전기. 경남 남해에서도 남쪽 끝 작은 마을 상주에서 동네책방으로 망하지 않고 연결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4주에 한 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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