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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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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등록 2014-10-14 15:31 수정 2020-05-03 04:27

‘잉여’라는 말은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현상과 시대정신을 지시하는 하나의 개념이다. 6·25 직후에도 잉여란 개념은 있었지만(손창섭, ?!), 그것은 지금과는 무척이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자리를 잃고서 방황하던 ‘6·25 이후의 잉여’는, 사실 필요(need)가 충족되지 못했기에 잉여였다. 최소한 그들은 필요에 상관항으로서, 직장과 삶에 고용되기까지- 즉 필요가 충족될 때까지- 기다리는 잉여였다. 6·25 이후의 잉여는, 필요해질 때까지 대기 중인 잉여, 즉 임시적 잉여였다. 그들은 가난해서 잉여였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의 잉여’는 사정이 정반대다. IMF 이후 등장한 잉여는 필요가 모두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잉여다. 그들은, 필요해질 때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또 언젠간 필요해질 거란 희망도 가지지 못하므로, 필요의 상관항도 아니다. IMF 이후의 잉여는 언젠가 고용될 거란 희망도 없기에 임시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풍요 속의 잉여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올드스쿨 잉여는 굶는다면, 뉴스쿨 잉여는 놀고먹는다. 전자가 아등바등 치열한 분투의 행동 방식을 가진다면, 후자는 무기력과 안정 유지의 행동 방식을 가진다.

상상력의 고갈에 증식하는 잉여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하지만 이런 ‘급변’은 단지 신체적·물질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급변은 오히려 정신적·무의식적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다. ‘6·25 잉여’는 최소한 치열하게 상상을 했다. 고개 너머 일자리가 있을 거라고, 이걸 하면 오늘 밥벌이는 될 거라고, 이걸 가져다 팔면 돈벌이가 될 거라고, 나아가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가세를 일으킬까 궁리하며 상상을 했다. 왜냐하면 잉여를 탈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상상력이기 때문이다(그 때문일까, 최소한 기업정신, 자본주의 모험심이 기를 펼 수 있었던 게고). 하지만 ‘IMF 잉여’는 반대로 상상력의 고갈에 증식한다. 오프라인에서 잉여짓을 하고, 온라인에서 잉여질을 하는 데에는 그렇게 처절한 상상력은 오히려 방해가 되고, 놀림거리가 된다. 상상력은- 각종 잉여질에서 볼 수 있듯이- 심심함을 때우는 역할로 축소된다(기업도 마찬가지 아닌가?). 두 다른 세대는 살아내는 시간의 구조 자체가 다른 셈이다. ‘6·25 잉여’에겐 시간이 항상 모자랐던 반면, ‘IMF 잉여’에겐 시간은 항상 남는다. ‘IMF 잉여’에게 시간이란, 때워야 할 시간, 죽여야 할 시간, 즉 잉여짓이나 뻘짓으로만 때워야만 하는 구멍과도 같은 시간이다.

바로 이 때문에, ‘6·25 잉여’가 미래지향적인 반면, ‘IMF 잉여’는 과거지향적이다. ‘IMF 잉여’에게 시간은 죽여야만 흐르는 시간, 즉 과거함으로써만 흐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 해대는 잉여짓이 반드시 페북이나 트위터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소상히 ‘기록’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 있을 터. 그것은 잉여질로만 간신히 기억되는 순간들의 행렬이다. ‘IMF 잉여’는 매 순간 죽어가는, 매 순간 소멸되는, 매 순간 과거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셈이다. 이 가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나로서는, 신세대 잉여들이 열심히 개발하고 또 혁신하는 참신한 잉여질들이 결국은 복고 드립과 추억 남기기로 수렴된다는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그들이 살고 있는 시간은 이 순간, 이미 추억인 셈이다.

향수는 가장 좋은 잉여질

정치의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IMF 이후에 나타나는 지배적인 현상은, 상상력의 고갈과, 무기력함을 버티어내는 아이디어들, 텅 빈 시간을 때우는 정책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시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상관없이- 경쟁적으로 과거를 찾아댄다. 향수야말로 이 무기력해지고 권태로운 투쟁의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가장 좋은 잉여질이기 때문이다. 이젠 정치도 잉여질인 거다. 최근 본 가장 엄청난 잉여질은 서북청년단의 재건이다. 그들은 매우 공격적인 노선을 표방하지만, 실상 그것은 상상력의 빈곤만을 과시하는 복고 드립이고 추억 남기기이며, 무기력해지고 무료해진 텅 빈 시간을 목표 없는 분노로 때워보려는 잉여질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상력은 조각이 맞지도 않는 과거에 기대어 놀고먹는다. 그들은 진정한 역사의 한량들이다.

김곡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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