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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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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등록 2014-08-18 15:50 수정 2020-05-02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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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폴란드를 대표하는 시인 비스와봐 심보르스카의 작품 ‘끝과 시작’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199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에겐 이성 중심의 인과율로는 온전히 포착되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다층적인 내면을 들여다보는 혜안을 갖췄다는 평가가 흔히 뒤따르곤 합니다.
드디어 끝입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흩날리는 빗줄기를 뚫고, 2천 리 길을 38일 동안 걸었습니다. 상처받은 도시 안산을 출발한 무모한(?) 발걸음은 생명을 삼켜버린 반도의 남단 야속한 바닷가를 뒤로하고, 다시 동학 농민운동의 흔적이 서려 있는 푸른 벌판을 따라 북상했습니다. 그러곤 기어이 목적지인 대전에 이르러 어깨에 짊어지고 2천 리 길을 걸었던 십자가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전했습니다. 지난 7월8일부터 도보 순례에 나섰던 안산 단원고 희생자 승현군과 웅기군의 두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이들과 함께했던 의 순례 동행기도 이제 막을 내립니다. 순례길 내내 앞장서 고생했던 정은주 사회팀장의 두 발은 서둘러 휴식과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지난 8월14일엔 작은 잔치마당이 대전 유성성당에서 열렸습니다. ‘두 아버지의 2천 리 완주 기념 세월호 작은 음악회 길 위에서’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38일간 길 위에서 한마음으로 만났던 사람들이 모인, 이른바 ‘쫑파티’였습니다. 1시간30분 동안 진행된 음악회 내내 두 아버지는 때론 웃음으로, 때론 눈물로 감사의 마음과 석별의 정을 전국에서 모인 300여 명과 나눴습니다.
끝났으되, 끝은 아닙니다. 이들이 2천 리 길을 마다 않고 걸었음에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아직껏 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또 다른 단원고 희생자 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33일째(8월15일 기준) 곡기를 끊은 채 길바닥에서 절규하고 있음에도, 진실을 밝히려는 열망은 진실을 덮으려는 꼼수에 여전히 능욕당하고 있습니다. 상처받고 소외된 이웃에 사랑과 위로를 전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8월18일엔 이 땅을 떠납니다. 그때쯤이면 떠들썩했던 한여름의 교황 열풍도 한풀 꺾일지 모르겠습니다. 교황 열풍에 얄팍하게 숟가락 하나 얹으려 했던 청와대는 뒤돌아 웃으며 그저 ‘계산서’나 뽑아보고 있겠지요.
결국, 우리입니다. 교황이 우리에게 전한 복음이 무엇이건, 그 복음을 이 땅에 실현하는 일은 우리 몫입니다. 도보 순례도, 교황도 갔습니다. 끝은 곧 시작입니다. 아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이 땅에서 끝은 언제나 다시금 시작이어야 합니다.

그간 의 페이스북 도보 순례 ‘중계’에 많은 애정과 관심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8월14일 열린 작은 음악회와 사진전을 찾아주신 분들께도 거듭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역시 결코 ‘끝’ 없이 언제나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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