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직 ‘환상 속의 그대’로

등록 2014-07-05 15:11 수정 2020-05-03 04:27
<ahref href="mailto:morgen@hani.co.kr">morgen@hani.co.kr">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아직 그대가 있다

터졌다, 또. 6월21일 강원도 고성 22사단 55연대 소속 최전방 일반전초(GOP)에서 수류탄 한 발이 터졌다. 주간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7명을 향해 또 다른 동료 소대원 임아무개 병장이 던진 수류탄이다. 임 병장은 이어 동료들을 향해 실탄 10여 발을 조준사격했다. 극단적인 통제와 규율이 지배하는 폐쇄 공간에서 벌어진 이 끔찍한 사고로 병사 5명이 목숨을 잃었고 7명이 부상당했다. 2005년 경기도 연천 전초(GP)에서 발생한 수류탄 투척 및 총기 난사 사건을 빼다박았다.
드디어 터졌다, 젠장. 이번엔 리스크가 터졌다. 지난호에 지금 우리 사회의 최대 리스크는 박근혜 대통령 그 자체라고 썼는데, 기어이 대통령 리스크가 터지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고 두 달 전 사의를 밝힌 정홍원 국무총리를 6월26일 유임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은 자신이 ‘경질’했던 총리를 다시 제자리에 끌어다 앉힌, 희대의 코미디 주인공이 됐다. 이건 단순히 뻔뻔함과 오기의 경지를 넘어, 아예 우리 사회에 ‘어깃장’을 놓겠다는 심보의 발로로 볼 수밖에 없다. 자신이 독단적으로 지명한 ‘문제적’ 인물(국무총리 후보자)의 흠결이 드러나 궁지에 몰리자 반성과 각성은커녕, “당황하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버렸던 카드를 도로 가져다놓으면~ 끝!” 하고 혼자 외치는 허무 개그?
둘 다 잊었다. GOP 총기 사고는, 슬프게도, 세월호 참사 판박이다. 철책 수비라는 임무에 가려 정작 해당 임무를 담당하는 장병들의 근무여건과 안전을 보살피는 각종 보호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환경에 내몰린 병사들은 최소한의 생명보호 장구인 방탄복조차 입지 않았고, 군 응급의료 체계가 갖춰지지 못한 탓에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고 만 장병도 여럿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깨워줬듯, 비극의 현장엔, “사람이 없었다”.
청와대 홍보수석이 ‘돌고 돌아 도로 정홍원’ 카드를 발표한 날은 세월호 참사에서 ‘생존한’ 단원고 2학년 학생 73명이 충격을 딛고 처음으로 등교한 다음날이다. 학생들은 ‘REMEMBER 0416’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노란 팔찌를 차고 교문을 들어섰다. 애초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정홍원 총리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적폐를 없애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정홍원 총리 유임은, ‘잊지 않겠다’는 학생들과 가족들의 눈물에 대한 가장 잔인한 ‘배신’이다.
터질 것이다, 결국엔. 이미 조짐이 보인다. 새누리당 안에서조차 ‘해도 너무한다’는 불만이 거세진다. 박 대통령이 생각을 고쳐먹을 마음이 전혀 없음이 드러난 이상, 결국엔, 터질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귀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가슴을 치며 ‘이 안에 내 자식 있다’고 울부짖는데, 누군가는 아직 ‘환상 속의 그대’로 굳건히 남아 있다. 누가 누군지 누구나 다 안다.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그 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은 오직 꼭 잘될 거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아직 그대가 있다



■ 은 제1018호부터 일부 꼭지를 새로 선보입니다. 지면 디자인에도 작은 변화를 줬습니다. 아울러 이번 여름 인턴기자 모집에 지원해주신 지원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지원해주셨음에도 기회를 드리지 못해 거듭 죄송합니다.</ahref>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