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TV 방송에서 하는 말을 듣거나 신문에 적혀 있는 글을 보면, 그 말들이 전부 진짜인 줄 알았다. 언론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었고, 또 ‘사실인지’ 확인도 안 하고 보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 믿음은 위태로워졌고, 이제는 의심부터 하게 된다. 솔직히 믿음이 더 가는 언론이 있고 덜 가는 언론이 있고, 그렇게 구별짓게 되었다. 매년 ‘언론 신뢰도 조사’ 같은 것을 하는 걸 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본인에게 확인도 않고 주변인 말만 듣고는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대개는 언론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기자들은 발로 뛰어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가. 현장에 가서 그 생생함을 직접 겪어서 쓰지 않겠는가. 이런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기사를 따라 읽다보면, 기사의 보이지 않는 주장과 논조에 나도 모르게 동조하게 된다. 특히 큰 사건이 터지면 언론은 많은 기사를 쏟아낸다. 범인이나 책임자를 강하게 비판하고 피해자의 피해를 더욱 강조한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피해가 클수록, 피해자의 입장에 깊이 공감할수록 가해자를 미워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게 된다. 그 미움은 때로는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피해자의 피해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언론 기사가 피해자 또는 그 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재작년, 그러니까 2012년 늦여름, 안철수씨의 대선 출마 소식으로 연일 시끄럽던 그즈음, 딱 일주일 동안 대부분의 언론이 한 사건에 집중했다.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이라고 불리던 아동 성폭행 사건이 그것이었다.
어린 학생을 성폭행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든 국민의 공분을 샀던 사건이다. 특히 집 안에 있던 아이를 안고 나와 저지른 범행이어서 충격은 더했다. 언론은 앞다퉈 사건 경위를 보도했다. 이웃 주민과 동네 PC방 아저씨까지 모두 취재원이 되어 한마디씩 했다. 경찰이 기자들에게 흘리는 얘기는 곧바로 기사화되었다. 특히 몇몇 언론은 ‘범인과 피해 학생 엄마는 둘 다 게임중독이었고, PC방에서 만나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아이 엄마는 가출을 일삼았다’ ‘아이를 들고 나갈 때 아이 아빠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라고 본인들에게 확인도 하지 않은 사실을 마구 보도했다. 피해 학생의 부모가 ‘성폭행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취지였다. 그러고는 범행 경로를 알린다는 이유로 피해 학생의 ‘집 위치’를 지도 형태로 공개했다. 피해 학생의 일기장도 입수해 공개했다. 병실에 몰래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댄 뒤 상처 입은 어린아이의 얼굴도, 상처 부위도 공개했다. 실로 많은 것이 공개되었다.
성금 모금한 단체 “부모 못 믿겠다”당시 언론 보도를 접하고는 많은 국민이 범인에 대해 분노했다. 그리고 범인에 대한 분노가 깊어질수록 부모에 대한 질타도 거세졌다. 구호단체는 피해 학생과 그 가족의 회복을 위해 성금을 모금해놓고도, 돈을 받게 될 부모를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아이 엄마가 성금 1억원을 들고 도망갔다’는 식의 얘기가 떠돌았다. 아이 엄마는 그런 글을 올린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글 올린 이가 실제 사정 얘기를 전해듣고는 ‘같은 엄마라서 피해자분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찢겨지고 상처 난 가슴에 소금까지 뿌리는 죄를 지었다’는 진심 어린 장문의 편지를 보내오자 그를 용서해 고소를 취소했다. 그 글을 쓴 사람 역시 두 딸의 평범한 엄마였다.
피해자 가족은 살던 동네에 계속 살 수도 없었다. 모든 주변 사람들이 가족을 알아볼 것 같았다. 멀리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남매는 새로운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참 우연히도 이전 동네에 살던 한 학생이 피해 학생의 언니와 한 반이 되었다. 어느 날 피해 학생의 언니는 그 친구로부터 ‘너 까불면 나주에서 있었던 너네 사건, 친구들에게 말할 거야’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피해 학생의 언니는 너무나 두려웠다고 한다.
피해 학생과 그 가족은 몇몇 언론을 상대로 피해의 배상을 구하는 소송을 냈다. 얼마 전 1심 법원은 피고가 된 언론사에 ‘피해 학생 본인과 가족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선고했다. ‘피해 아이 엄마가 게임중독’이라든가, ‘아빠가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라든가 하는 보도 내용이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라고 볼 수 없는데도 이를 보도해 부모의 명예를 훼손’했고, ‘집 위치, 집안 내부, 상처 부위 등을 공개한 것은 가족의 사생활에 관한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는 것이 주요 판결 이유였다. 일부 언론사에 대한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고, 또 다른 언론사는 항소해 항소심에서의 법정 다툼이 예정돼 있다.
진심 어린 사과를 듣고 싶다이 소송이 시작되기 전인 2012년 12월 한국기자협회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공동으로 ‘성폭력 범죄보도 세부 권고기준’을 마련했다. 언론의 과열 경쟁으로 성폭력 피해자 가족이 받은 ‘2차 피해’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와 같은 피해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자체 보도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 성폭행 사건 이후 피해 학생과 온 가족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은 서로에게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있다고 했다. 힘들어하는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엄마는 소송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언론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듣고 싶다’고. 법원의 1심 판결이 있었지만 아직 언론은 가족을 찾아와 사과하지 않았다. 자신을 ‘패륜 엄마’라 비방하던 또 다른 엄마를 용서했어도,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과연 이 가족의 피해는 멈춰설 수 있을까. 그들의 상처는 아물 수 있을까.
요즘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슬픔에 빠져 있다. 이 커다란 비극 가운데에서도, 언론 보도로 피해를 받는 사람이 또다시 생겨나고 있다. 부디 언론이 상처받은 자들에게 진심으로 ‘공감’하길 바랄 뿐이다.
류신환 변호사·법무법인 지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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