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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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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추억

장애인야학에서 떠난 2005년과 2013년 모꼬지
장애인 환경 개선됐어도 ‘함께 놀기’는 여전한 난제
등록 2013-12-18 17:38 수정 2020-05-03 04:27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와 학생들이 지난 11월 야유회 장소인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입구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노들장애인야학 제공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와 학생들이 지난 11월 야유회 장소인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입구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노들장애인야학 제공

1년에 한 번 우리(노들장애인야학)는 모꼬지를 간다. 강이나 바다를 낀 곳에서 집에 갈 걱정 없이 푸지게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이다. 여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모꼬지는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다. 문제는 우리의 빛나는 장애출현율과 터무니없이 가난한 주머니 사정. 시즌이 다가와 ‘어디로 갈까’ ‘뭐하고 놀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노들 초년생들에게 ‘좀 놀아본’ 선배들의 지혜가 전해진다. 그건 ‘감히’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그해의 전 지구적 기운이 우리를 휘감고 돌다가 마지막으로 가닿는 곳. 노들을 굽어 살피는 신이 학생 수, 휠체어 대수, 활동보조서비스 시간 등을 따져 꼼꼼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점지하는 그곳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춘 해수욕장일 때도 있었고, 두물머리 같은 저항의 땅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신의 한 수가 늘 성공하는 것만도 아니었고, 신이 운전을 하거나 밥을 하거나 학생들의 활동보조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교사들의 몫. 교무실에선 모꼬지 가기 싫다는 탄식이 터져나온다. 2005년 모꼬지를 다녀온 뒤 어느 교사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침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는데 정작 단합하는 건 잊었더라고.

함께 간 동해바다, 짧았던 환희

그해에는 장애인단체가 수련원으로 쓰기 위해 개조했다는 강원도 평창의 어느 폐교에 묵었다. 1시간쯤 차를 타고 나간 곳에 바다가 있었다. 태어나 바다를 처음 만났다는 이와 그이의 발을 기어이 파도에 담그게 해주고 싶었던 이들이 힘을 합쳐 전동휠체어를 바다까지 밀고 들어갔다. 환희의 순간은 짧았다. 소금물 먹은 휠체어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참을 씨름해 겨우 모래사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건 기나긴 노동의 시작에 불과했다.

숙소에 돌아온 교사들은 학생들의 목욕을 돕고, 전동휠체어를 씻고, 밥을 하고, 밥 먹는 걸 돕고,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 가는 걸 돕고, 청소를 하고, 커피를 끓이고, 커피 마시는 걸 돕고, 뒤풀이 음식을 준비하고, 술 마시는 걸 돕고, 술자리를 정리하고, 취침을 돕고, 다시 아침이 되어 밥을 안치고 학생들의 기상을 도왔다. 바다에 발 한 번 담그는 일이 누군가에겐 그리도 어려울 수 있다니.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럼에도 함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뻐근했다. 힘들지만 즐거웠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몇몇 교사가 회의적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함께 놀았던 것이 아니라 ‘놀아주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벗이고 동지였던 이가 ‘봉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참기 힘든 것은 그 대상의 무게가 아니라 균형을 잃고 쓰러진 관계의 일방성이다. 며칠 뒤, 학생 한 명이 이동 중에 생겼던 안전사고에 미흡하게 대처한 책임을 물어 교사들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왜 너희만 힘들었다고 생각해, 라고 일침을 가하듯이. 균형을 되찾은 우리는 법정에서 만났다. 자유를 빼앗긴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된다. 그 미움이 서로를 향했다는 사실이 쓰라렸다. 기본적 욕구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조건 위에서 이루어진 단합이란 그렇게 허약했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봉사’라는 말에는 어딘가 불륜의 냄새가 났다. 무엇이든 우리가 하면 연대이고 로맨스라고 믿었던 그때. 반인권적·반장애적 행동지침이 모꼬지라는 이유로 허용되었던 그때. 우리는 어쩌면 우리들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던 그 불륜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더욱더 소처럼 일했는지도 몰랐다.

8년이 흘렀다. 평균 나이 마흔을 넘긴 사람들에게는 단풍놀이가 제격인 계절이지만 올해 노들의 신이 점지한 곳은 에버랜드다. 천장 없는 놀이공원에 첫눈이 내렸다. 새벽밥을 먹고 집을 나서 지하철을 네다섯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먼 길을 학생들이 각자 알아서 찾아왔다. 강산 위에는 경전철이 뚫렸고, 그이들의 옆에는 활동보조인이 있었다. 무사히 정문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미션처럼 자유이용권과 식사권이 주어졌다. 장애인 여행 바우처가 사용되었다고 했다. 세상의 변화가 다시금 놀라웠다. 활동보조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남이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도 돈 걱정이 없었다. 이제 함께 놀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보조인·복지카드 덕에 몸은 자유로웠지만

평일이라 혼잡하지는 않았지만 인기 있는 몇몇 관은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장애인 먼저’. 복지카드가 요술을 부려 우리를 줄의 맨 앞으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호박마차가 아니라 그냥 호박. 휠체어를 탄 A는 탑승할 수 없다. A가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자유이용권을 쥐고 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조급해진 활동보조인이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휠체어에서 분리된 A의 몸이 축 늘어져 위태로워 보였다. 곧 둘 다 너덜너덜해지겠군,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지켜보던 J가 휠체어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휠체어에 기대야만 몸을 곧추세울 수 있다. “어차피 무서워서 못 타” 하며 순순하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추워 보여서 코끝이 찡했다. 그는 결국 놀이기구 타는 것을 포기하고 자유를 빼앗긴 동물들을 보러 갔다. 나는 그를 따라가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갈등은 짧았다. 그의 옆에는 활동보조인이 있었고, 내 손에는 비싼 자유이용권이 쥐어져 있었다. 그동안의 모꼬지에서 일만 하고 놀지 못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나는 바이킹을 타고 소리를 꽥꽥 질렀다.

늦은 저녁 강당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전동휠체어들이 무대를 제외한 삼면의 벽에 착 달라붙어 일제히 전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웅~ 낮고 노곤한 기계음이 나에게 묻는 듯했다. 바이킹은 재밌었니.

‘함께 놀기’란 ‘함께 투쟁하기’보다 열일곱 배쯤 어려웠다. 모든 놀이기구의 출구를 빠짐없이 기프트숍으로 연결시켜놓은 영악한 자본이 산도 깎고 강도 덮는 능력을 가지고도 기어이 휠체어 하나 들어갈 통로를 열어놓지 않았다. A와 함께라면 더딘 속도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고, J와 함께라면 놀이 자체를 포기함으로써 놀이의 연대를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나를 분리해 내 옹졸한 놀이의 영역을 확보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돌이켜보면 ‘함께 놀기’는 모꼬지를 떠난다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의 과정 속에서 증명해야 하는 과제 같은 것이었고, 우리가 ‘함께 산다’는 문제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어지는 조건은 계속 달라졌지만 작은 차이를 들추어 우리의 분리를 부추기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유혹 앞에서 갈등했고 고개 돌렸고, 분열했다.

실패를 고백할 때 우리는 진실하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실패를 시인하는 것, 그 조건 위에서는 결코 함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일지 모른다. 우리는 함께 노는 것에 실패했고 함께 사는 것에도 실패했다. 오직 그렇게 고백할 때만이 함께 진실하다. 우리가 나누어 가진 분열의 추억만이 진실하다. 사랑과 봉사의 환상이 깨지고 진정한 연대가 시작되는 곳은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진실을 대면할 때다.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다.

분열의 책임은 우리에게 없다. 다만 그 조건이 틀렸음을 말할 책임만 있을 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분열의 추억이 쌓인다. 함께 싸워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진정한 모꼬지는 아직 가보지 않았다.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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